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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길, 악인의 길 (잠 4:10-19)

정말 의인의 길을 돋는 햇빛과 같아서 광명에 이르게 되는 걸까? 정말 그럴까? 그런데 왜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은가?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 (잠 4:1-9) +++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0-27)

오늘 읽은 잠언서 4장 18절 19절 말씀에 보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죠. 의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것이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악인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넘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다시 한번 기록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솔로몬이 솔로몬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까지 이 말씀을 강조해서 또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이 상을 받고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악인이 오히려 더 잘 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또 들려주고 또 들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의 가르침은, 우리를 세뇌하는 가르침이 있는데, 우리는 교회에서만 세뇌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통해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거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 ‘의롭게 살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봤자 헛것이다’ ‘의인이라고 해봤자 오히려 고난만 당할 거’라고 하는 그 사상을 우리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이 세상이 주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이 주입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의인은 돋는 햇살과 같다. 결국은 큰 광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 ‘악인이 지금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넘어지게 될 것이고, 패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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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악인은 오히려 더 잘 사는 것만 같아요. 친일파들은 그 당시에도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각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부가 후손 만대에 잘 물려주고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독립운동을 했고 그리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오히려 우리가 친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면 훨씬 더 낫지 않았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우리 마음 가운데 들려주게 되는 겁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사람은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약자를 위해서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변절하게 되는 겁니다.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열심히 독립운동하다가 나중에 다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변절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 잘 되면 좋겠고 정말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시면 좋겠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되면 좋겠는데,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참 궁상맞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죄악을 범하면서 정말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수많은 부를 누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질문들이 자꾸만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그 믿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결정합니다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 ‘지금 이 세상이 누구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요. 만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선하시고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이 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고 아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고 생각이 되고 오히려 이 세상은 사악한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주먹이 정의고, 권력이 힘이고, 돈이 우리의 정의라고 생각되는 그런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면 결국은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우리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에 대한 믿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런 하나님의 뜻에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될 대로 이 세상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아무런 통제 없이 그렇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이 된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악을 행하면서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누구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보셨어요? 하나님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제가 여기 서 있는 것은 보이십니까? 저를 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적인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래서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그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임금님이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옷을 입고 있는데, 과연 그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에 사슴이 있고 멧돼지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 사슴이 왔다 가고 멧돼지가 왔다 가는데 그래서 단 한 번도 사슴을 본 적도 없고 멧돼지를 본 적도 없는데, 그 농부는 ‘멧돼지가 있구나’ ‘사슴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흔적을 보고서 아는 거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밭이 망가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멧돼지의 발자국이 찍혀 있고, 사슴의 발자국이 찍혀 있고, 그리고 짐승들이 와서 곡물들을 그 식물들을 다 먹어치운 흔적들이 보이고, 배설물이 그 자리에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하, 우리 농장 주변에 멧돼지가 있구나.’ ‘우리 농장 주변에 사슴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아야, 울타리를 세우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책을 세워야 농사를 잘 짓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있다고도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사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 세상에 엄청나게 있어요. 엄청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그 천지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믿습니까? 이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기는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그 무에서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니까, 수억 년이 지나고, 수십억 년이 지나고, 수천 억 년이 지나니까, 아무것도 없는 그 빈 공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만들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지구의 생명체가 탄생이 되고 저절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 그게 더 논리적이고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이 지구가 있는 것이고, 모든 생명체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누가 만들었기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그게 더 합리적이고 더 논리적입니까? 당연하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 지구가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어떻게 만들어질 수가 있어요?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 지구를 보면서 우리 자연 만물을 보면서, 천지 만물을 보면서, ‘아하, 천지 만물이 있는 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조물주가 계시기에 만드셨구나’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만드신 그 흔적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과연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지금 만들어진 이 세상을 보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는 것은 알겠어요.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통치자 하나님,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흔적을 통해서 알아야죠. 그 흔적이 뭡니까?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지구와 태양이 아주 적당한 거리를 떨어져서 그 지구가 태양 주변을 단 일초도 조금도 차이 없이 계속해서 그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데, 왜 돌고 있어요? 왜 안 멈추죠? 왜 그 지구가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죠? 왜 그걸 돌고 있죠? 왜 지구가 자전을 하죠? 이 모든 것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그대로 움직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움직이고 아침과 저녁이 있고, 그리고 일상이 유지되는 것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생명체가 태어나고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상이 유지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일상이 일상처럼 유지가 되는 거예요.

1 더하기 1은 왜 2입니까? 왜 1 더하기 1이 2가 되죠? 하나님께서 그 법칙을 그대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엉망진창, 그다음에 또 뭐죠? 뭐라고 해야 되죠? 아무튼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 일상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고, ‘아, 봄이니까 우리가 씨앗을 뿌려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고 씨를 뿌렸을 때 가을에 추수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통치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씨를 뿌렸을 때 그것이 씨앗이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어떻게 이 지구가 이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걸 그 어떤 방법으로 확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일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maintain 하고 계시고 sustain 하고 계시고 유지하고 계시고 관리하고 계시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도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보상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의인은 칭찬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점은 약간 애매합니다. 왜 애매하죠? 왜 애매하냐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 삭을 베푸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때는 안 그런 것처럼 보일 때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그 흔적들은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애쓴 자에게 보상이 있는 것이죠.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주님께서 상을 주시는 겁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에게는 풍성한 곡식을 주는 겁니다. 풍성한 수확을 주는 겁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성적이 나오고, 좋은 성적이 나와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다음에 모든 길들이 척척 척척 열리는 그 모든 것들이 열심히 수고한 자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거죠. 우리가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열심히 장사를 했더니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그래서 내가 열심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고하며 애쓴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죠.

이번에 올림픽이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요. 올림픽에서 상을 타는 선수들이, 누가 상을 탑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다해 가지고 훈련을 했던 그 사람들이 금메달을 따는 거예요. 왜? 수고의 대가를 받는 거죠.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열심히 뛴 사람들이 금메달을 받고 은메달 동메달을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게으른 자가 있어서 자신의 생활에 책임도 지지 않고 열심히 인생을 살지 않고 그저 게으르게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런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고 그리고 정말 빈곤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게으른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수고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고 수고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없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보면서 ‘아 지금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종종 종종 어떤 일들이 발생하냐면 그런 법칙이 깨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악하게 살고 정말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셔야 할 텐데, 우리가 지금 이 현상에서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벌을 받지 않으면서 떵떵거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그것을 바라보면 ‘정말 하나님 살아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엄청 정말 황망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요.

시편 73편 1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는 <아삽의 시>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아삽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정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가 살던 시대에 사람들을 봤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악을 범하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떵떵거리면서 살면서 건강하고 죽을 때에도 편안하게 죽고 아무 문제없이 죽는 그 모습 보면서 아삽이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이런 일을 방치해 두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죠. 그게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이렇게 방치해 둘 수가 없는 거예요. 방치해둘 수가 없는 거. ‘왜 하나님이 꼭 온두라스의 모습과 같냐 이 말이에요?’ 예전에 제가 온두라스에 갔더니 국가 경찰이 있어요. 공권력이 있어요. 그런데 힘을 하나도 못 써요. 밤중만 되면 갱단이 온 도시를 장악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총을 쏘고 마약을 거래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는데도 전혀 힘을 못 쓰는 그런 후진국가를 가보았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 세상이 왜 그런 온두라스처럼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악이 판치고 그러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손도 못 쓰고 있느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고,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몇 가지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대답, 몇 가지 대답을 해주고 있는데, 한 가지 대답이 모든 걸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방법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 대답은 잠언서 1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이 그냥 제멋대로 날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목적을 가지시고 그 소용이 있어서 그 악인을 그렇게 두셨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악인이 아무런 제재 없이 활개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그냥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 악인들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예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게 되냐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상 숭배하는 나라죠. 바벨론은 그야말로 악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민족 바벨론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바벨론은 나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의 민족을 치셨고,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다스리기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다스리고 그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 바벨론을 사용하시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잘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보면, 악인이 그냥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 안에서 그렇게 움직인다고 성경은 대답해 주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의 대답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는 교회 교인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이런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는 겁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하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해 주고 있냐면,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한 아버지로서, 그들도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쭉 살펴보면 이 외에도 악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대답들이 있는데요. 이 대답들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뭐냐면 악이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변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친일파, 지금 일본 제국이 우리나라를 압제하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이제 8월 15일이면 우리 독립 광복절이지 않습니까? 독립은 올 것 같지도 않고, 이런 상황 가운데서 독립운동하다가 ‘아, 우리나라의 독립은 영영 오지 않는구나’ 생각하면서 변절하듯이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악이 판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가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립시킬 때가 오지 않는가 보다’ 하면서 우리가 변절해서 악에게 굴복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이 말씀 가운데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변절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잠서 4장 18절 19절의 말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걸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진짜 믿음이에요.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증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그게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법 없는 자들의 손에 의하여 처참하게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이것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죄수인 바라바는 무죄 방면하고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은 극형에 처하는 이런 엉터리 재판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그 빌라도의 법정을 보면서 항거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잠잠하셨어요.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온전하게 증명한 것이 부활입니다.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이제는 끝장난 것처럼 생각이 되었지만, 다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우리의 삶이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vindicate 해주고, 신원해주시고, 우리를 다 품어주시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 견뎌 나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언제 드립니까? 안식일인 토요일 예배를 하기 위해서 모이는 게 아니고, 구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우리가 토요일 안식일 날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다음 날인 주님의 날에 모여서 예배를 합니다. 주님의 날에 모여서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생생한 의미를 매주 매주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요. 일주일 내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야말로 황당한 일을 당하면서 사는 거죠. 양보했더니 오히려 더 손해 보고, 용서해 주었더니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더니 오히려 깔보고,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완전히 망할 것 같 같은 그런 삶을 이 일주일 내내 살다가, 그런데 이제 우리는 완전히 망한 것처럼 생각되는 그 순간에, 주일 아침이 되면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겁니다. ‘맞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셨지!’ 그날이 주일 아침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 아침에 우리가 일어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이고, 피곤한데 또 교회를 가야 되냐?’가 아니라, 찔리는 분이 계신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구나!’ ‘우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맞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자꾸만 세뇌하는 이 세상의 그 세뇌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 “의인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른다”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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