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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8-25)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험 장담했던 베드로는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다가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한 여인이 다가와서 “너도 예수와 한패가 아니냐?”라고 묻는 그 말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 예수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져버렸던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다시 찾아오셨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사명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으신다고 한다면, 그 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완벽한 사람만 주님께서 찾으신다고 한다면, 베드로도 불합격이고, 바울도 불합격이고, 우리 모두도 다 불합격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성공한 인생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을 향해서 다시 찾아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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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는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지만,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내 실제 모습은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이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 손에는 그물이 들려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남편을 사랑하고 우리들의 아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인내하기보다는 화를 내기가 쉽고, 친절하기보다는 너무나도 싸늘하게 대했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소홀합니다. 다른 건 다 해요. 코로나가 걸릴 수 있는 식당에도 다 가요. 학원에 가서 공부도 다 해요. 그런데 예배하는 것만큼은 마음이 열리지 않고, 예배하는 것만은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게을리 해 버렸고 살 만하다 싶으면 주님을 잊어버리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고 그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이고,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다시 찾아오셨고, “순 엉터리구나. 네 믿음이 순 가짜구나.” 그 사랑이 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사랑이라고 무시해 버리시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베드로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면서 순 가짜라고 말하고 욕해버리고 떠나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랑할 능력이 없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오셔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말은 번지르게 하지만, 그러나 전혀 말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그런 실패한 인생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그렇게 우리의 힘으로는 구제 불능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고 그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명을 맡겨주시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망가져버린 인생 실패해버린 인생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재생해 주셔서, 그리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일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주일학교 학생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꿈이 뭐냐? 네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제게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커서 garbage man 되고 싶어요. 청소부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유치부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눈에, 커다란 청소차 뒤에 한 손으로 그 차를 붙들고 따라가, 그 청소차를 타고 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던 거예요. 청소부가 그 청소차를 딱 붙들고 가면서 그 쓰레기통을 차에 던지고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던 그 꼬마 남자아이는, “저는 커서 청소부가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가 그 아이에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래 정말 좋은 꿈을 가지고 있구나. 이 세상에 더러운 것들 치워버리고, 그래서 깨끗한 세상이 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고, 이 세상에 망가진 것들 다시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만드는 그 일이야말로 너무나도 소중한 일인데, 너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구나.”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신 것이고, 망가져버린 우리 인생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청소부처럼 오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고 설명해 준 적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히 망가져 버려서 아주 냄새가 나버리는 그 베드로에게 다시 오셔서, 그리고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내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네가 원하지 않고 정말 고통스러운 자리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니까, 그 자리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그 모습이 너무나도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서 회복을 받고 주님께서 다시 불러주신 그 은혜의 자리에 서 있던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으로 엄청난 감동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같이 그물을 던졌던 한 제자의 모습이 베드로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베드로의 모습이 베드로가 본 사람이 누구냐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알려져 있는 그 제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는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요. 그 제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는 그 표현이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누구였을까?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서 그 예수님께서 정말 사랑하셨던 제자가 누구일까? 애(愛) 제자가 누구였을까? 추측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제자는 아마도 요한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한복음을 썼던, 바로 그 요한복음의 저자였던 요한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고 자기의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그냥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라고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제자를 바라본 거예요. 평상시에도 열두 제자 가운데서 특별히 아꼈던 제자, 예수님께서 성만찬 자리에서 옆에 두고, 그리고 친이 떡을 떼어주시기도 하고, 정말 사역하는 내내 주님께서 늘 가까이하셨던, 사랑을 보여주셨던 특별한 애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제자가 눈에 들어오면서 궁금증이 생긴 겁니다. 예수님 나에게 그런 사명을 주셨다고 한다면, 실패한 나에게도 그런 놀라운 사명을 주셨다고 한다면, 저 예수님께서 정말 사랑하셨던 저 제자는 앞으로 어떤 사명을 받겠습니까? 저 제자는 어떤 길을 가게 되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궁금할 만합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사명을 주셨다고 한다면, 평상시 주님께서 정말 사랑했던 그 애 제자에게는 과연 어떤 사명이 주어질 것이고, 저 제자의 사명이 그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어본 겁니다.

예수님 저 제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궁금할 만했던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궁금하면, 500원!”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21장 2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내가 이 제자를 오랫동안 머물게 둔다고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얘기는 이 제자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가정법입니다. 저 제자를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고 할지라도, 아니면 일찍 죽는다고 할지라도, 아니면 이 제자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저런 일을 당하게 되고, 무슨 일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게 너한테 무슨 상관이냐?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가 정말 중요한 말씀인 거죠. 너한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할 일이 있는데,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이야기를 주님께서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한 주간 동안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해 주셨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한 주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어떤 길을 가게 되든지, 그게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남들이 순교를 당하든, 남들이 영화로운 자리에 올라가든, 남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든 비난하든,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가든, 그것에 상관할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든 말든,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말든,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들은 늘 다른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늘 우리들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갑자기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정말 좋은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는 그 순간부터 불행해지고, 그때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적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행복하고, 왠지 모르게 감사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절망을 하든, 나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하게 되든, 그것은 건강한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건강한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나는 괜찮구나. 생각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제대로 된 바른 태도라고 할 수가 없을 겁니다.

물론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보다는, 감사하는 것이 조금 더 낫겠지만, 그것도 결코 바람직한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든 다른, 사람들이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None of your business.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그건 너에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나와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바라보며,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맞출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넘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순간 넘어지기 시작해 버렸습니다. 사울 왕이라고 하는 사람도 사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왕으로 세울 만한 그런 사람이었고, 위대한 사람의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앞에 다윗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어린 소년이 등장하는 그 순간 사울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다윗은 다윗의 일을 하고, 사울은 사울의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사울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면서,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해 버렸습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버리고, 다윗을 죽이는 일에만 매진하다가, 결국 실패한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르다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마르다는 정말 주님을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여인이 마르다였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섰고,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르다의 눈에 예수님이 아닌 마리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그 마리아를 보면서, 마음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겠는데요. 바리새인들도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려고 하는 열정적인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보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이 중요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해서,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고,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말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최고의 작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 걸작품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상품처럼 찍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상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똑같은 것이죠.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으로, 모든 것들이 다 똑같은 것이 상품입니다. 남들이랑 똑같은 것이 상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각각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술품, 걸작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걸작품으로 만들어 놓으셔서 다 다르게 만들어 놓으셔서, 다 다른 것이 정상이고, 달라야만 마땅한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들은 내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지 비슷하지 아니한지 거기에 신경을 쓰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것 때문에, 다르다고 교만해지고, 다르다고 우울해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다 다르게 만드셨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지 않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다고 절망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페라가모를 신으면 나도 신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걸 입으면 나도 입고, 똑같아지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다 잘못된 생각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는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 5절 말씀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잊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 한국어로 번역된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말씀인데요.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인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Each one should test his own actions “각각 자기 자신의 행동을 살펴야 할지라.” Then he can take pride in himself, without comparing himself to somebody else, “자신을 다른 그 누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for each one should carry his own load. “각각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져야 할 것이다.” 비교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비교하면서 마음에 안도를 하고, 비교하면서 행복해지고, 비교하면서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보고, 그것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큰 일을 이루어도 하나님의 사명이 더 크다면 그건 부족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시할 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그만큼이면 충성을 다한 것이에요.

우리는 사람 앞에 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에 가려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 않아야 그제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감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아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분노가 일어나고, 때로는 좌절감이 생기고, 때로는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시기와 질투와 절망이 생긴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만 보게 하여 주옵소서.”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보이고, 그리고 주님께서 보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 못 박는 자들을 보면서도, 그 못 박는 자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신을 못 박는 그 사람들만 바라보았다고 한다면, 십자가를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셨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며 주님께 맡겨주신 그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였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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