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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눅 23:44-49)

자신들을 기득권을 지키지 위해서라면 한 사람을 부당하게 반역죄로 몰아 처형시키는 인간의 그 탐욕스러움은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적인다. 과연 우리에겐 소망이 없는가?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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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체포되어서 사형을 당하기까지는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요일 저녁에 혹은 금요일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체포되시고, 그때로부터 불과 15시간도 채 안 되는 그 시간에 속전속결로 예수님께서는 사형 언도를 받자마자 바로 십자가 처형이 되어서, 운명하시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운명하셨는가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처형이 되는 것은 사실 당시 로마의 법체계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그런 엉터리 재판이었고, 그리고 사형 집행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충분히 이렇게 피고소인의 권한이 보장이 되고, 충분히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이 되면서, 증거에 의해서 잘 재판을 하게 되고, 또한 항소할 수도 있는 그런 권리들도 있었는데, 이렇게 조급하게 속전속결로 처형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빨리 예수님을 처형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운동을 일거에 타진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그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5년에 인혁당 사건이라고 해서, 국가기관에 의해서 정말 죄 없는 사람들이 간첩으로 조작당하여, 대법 판결이 있은 후에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이 있었는데, 그러한 것도 그렇게 빨리 집행을 했어도, 그때에도 충분히 재판이 3심까지 가게 되는 절차가 지켜졌는데, 예수님의 이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억울한 방식으로 체형이 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당시에 종교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불법 조작으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이득을 위해서라고 한다고 하면 사람의 생명을 전혀 개의치 않고 죽여버릴 수 있는 정말 포악한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인데요. 그러한 일들이 그 옛날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날에도 전 세계 방방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미얀마의 군부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들의 백성들을 향해서 총뿌리를 부려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나라에서도 총과 칼은 들이밀고 있지는 않지만, 조그마한 이득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러면, 참, 노동자들이 과로로 인해서 죽어가고, 안전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죽어나가는, 그럼에도 돈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죽은 것이라고 폄하해 버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눈하나 깜짝깜짝하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우리 정말 죄악이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서 자꾸만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에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해가 뜬 지 여섯 번째 되는 시간에서부터 아홉 번째 시간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이 빛을 어두워지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간으로 하면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일인데요. 예수님께서 아마도 오후 3시 정도에 운명하신 것이라고 생각이 되니까,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까지 약 3시간 동안 온 세상이 어두컴컴해지는 갑작스러운 이상 기후가 이상 징후가 그 당시에 있었다고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죽인 것이 정말 악이 승리하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어둠이 온 세상에 덮인 것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 빛 되신 주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어둠이 만연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고, 또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내가 3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성전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행위가 되는 것이고, 정말 주님을 죽인 것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7개의 말씀을 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저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하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또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그 말씀으로 7번의 말씀을 하시면서, 운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일곱 번째 아니면, 여섯 번째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잠잘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면서 기도했던 기도문 가운데 들어 있던 그 표현이라고 합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내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하여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가 잠이 들게 된다고 한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눈을 뜰지 뜨지 못할지 알지 모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전적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맡기면서 걱정하며 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내 영혼을 맡겼으니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기도하는 제목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고 하는 기도 제목이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도 그 기도의 제목과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 나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며 운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힘들어서 절교하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이 죽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주님께 내 영혼을 맡기게 될 때, 우리가 하룻밤 자고 난 다음에는 다시 해가 뜨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주의 은혜로 인하여 부활하실 것을 믿고, 신뢰하며,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 위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맡긴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을 때에 맡길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돈을 은행에 맡겼을 때 안전하게 보관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맡겨 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은행이 영업정지에 들어가게 되면서, 돈을 찾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면,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는 맡길 수 없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맡긴다고 하는 것은 믿고 신뢰할 때에서야 비로소 맡길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천지가 개벽해 버리고,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그런 불안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우리가 온전히 신뢰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오. 환란 가운데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치므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던 시편 기자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그 상황 가운데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 십자가의 기를 가운데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것이고 내 목숨을 빼앗겨버리는 것으로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난다고 하는, 그런 황당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그 현실만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마지막 순간에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긴다고 고백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들을 늘 실망시키는 것이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 이 세상에 펼쳐지는 일들이 그렇게 가게 되겠지만,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랬는데요. 아들을 제물로 바칠 때 아브라함은 황당했을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그런 명령을 하시는 것만 같아서 완전히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아들을 바칠 수가 있었는가?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아들 이삭을 능히 살리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것이죠.

오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도 걸어가는 길 가운데 십자가의 길과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늘 기쁨과 감사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눈 앞에는 정말 황당한 일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버리는 그런 엄청난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믿고 신뢰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보다도 더한 상황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덤에 갇힌다고 할지라도 이 무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분을 다시 살리시고,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되, 십자가만이 아니라 죽음 가운데서 부활을 시키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어떠한 순간에도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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