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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눅 23:26-43)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속에 우리들이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구경꾼들에서부터, 비방하고 조롱하는 무리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겉옷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 예수님을 향해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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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어 운명하시게 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를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 구레네 사람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하필이면 그때 예수님께서 골고다의 형장을 향해서 걸어가시는 길에 만나게 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때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로마 군인들이 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그렇게 강제해서, 할 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따라가게 된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의 십자가 집행하는 그 방법에 의하면, 십자가의 그 형장에는 이미 기둥이 세워져 있는 상태에서 새로 기둥은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면, 가로 기둥은 십자가에 메어 달릴 그 죄수가 가지고 그 현장에까지 가는 것이 그 당시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종종 어떤 교회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는 십자가의 형태를 쥐고 가는 퍼포먼스를 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림에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가로로 되어 있는 막대 라틴어로 파티블룸(patibulum)이라고 하는 그 막대를 한 60kg 정도 되는 무게의 나무를 지고서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걸어가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채찍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셔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저 나무를 들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꾸만 쓰러져서 그런 힘조차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주변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의 형틀 파티블룸(patibulum)이라고 하는 것을 지고 가도록 강제해서 그걸 치고 가는 사람이 오늘 26절의 말씀 가운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본문에 등장하는데요.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이제 죽음의 형장을 향해서 가게 되는 그 충격적인 상황 가운데서, 울면서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죠.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서 아무 죄가 없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서, 잘못된 판결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억울해하기도 하고 원통해하기도 하고, 주님께서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면서,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왕국이 이스라엘을 아주 강압적으로 복합적으로 부당하게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부당한 통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보다는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을 착취하고 탐욕적이고 악한 행위들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그런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적이고 악한 행위를 또다시 목격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마음이 쓰려서, 울고 있는 그 희생양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35절 말씀에 보면 그 모든 과정들을 아무런 감정에 이미 없이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구경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하는지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 채, 그저 방관하며 옆에서 혀만 끌끌 차기만 할 뿐이고, “거 참 안 됐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방관자로서, “거 참 안 됐구나”라고 바라보만 보는 그런 방관자로처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인들처럼 울며 정말 가슴 아파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감정에 이 이입 없이 바라보는 구경하는 사람들만 그 자리에 또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구경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서 비웃고 조롱하고 비방하는 사람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관리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며 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36절에 보면 군인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했고 39절 말씀에 보면 같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옆에서 메어 달렸던 한 행악자도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왜 비웃는 것일까요? 왜 조롱하고 비방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런 죄를 행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나쁜 일들을 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피해를 당한 것도 아닌데, 그 예수님을 보면서 조롱하고 돌을 던지는 그 대열에 함께 합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어떠한 동정심도 없고 그 어떠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가짜 뉴스에 휘둘려서 그 예수님을 향해서 비방하고 조롱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는, 정말 사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34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의 그 옷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서로 흥정을 하고 제비를 뽑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그 옷을 완전히 밝아 벗겨서, 알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게 되었을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입고 다니셨던 그 옷이 최고급 옷은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입고 다니는 그 옷들은 어느 정도의 재산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심지어 빚을 졌을 경우에는 그 옷을 담보로 잡기까지 했었다고 하니까, 정말 그 당시 아무것도 없고 무엇인가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던 그 시절에, 통으로 짠 옷 그리고 그 옷 입었던 그 옷들을 서로가 차지하기 위해서, 이것은 네가 가지고 이것은 내가 가지고 서로 공평하게 나누자고 군인들이 그 옷을 얻기 위해서 서로 흥정을 벌이다가, 통으로 짠 그 옷은 누가 서로 나누어 갖기보다는 한 사람이 몰빵을 해서 가져가자 하는 식으로, 제비를 뽑아서 가져가려고 하는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과 흥정이 그 밑에서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또 등장합니다. 42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옆에 달렸던 또 한 명의 행악자는 주님 앞에 간청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아무런 힘도 없이 죽어가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주님에게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망성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야기하는 한 행악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해서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나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주님은 한 분이신데, 그 똑같은 예수님을 향해서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제각각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모습이 오늘날 21세기 오늘날 예수님을 향해서 보여주는 반응과 어쩌면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구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할 수 없이 압력에 의해서 로마 사람들 당시에 로마 군인들이 아무나 붙잡고 일을 시키면 그 일을 해야만 했었던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요.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억지로 강압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할 때 전혀 기분이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그 길을 따라가야만 했었고, 억지로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했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어쩌면 오늘날에도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고 억지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었지 않았을까 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레네 사람을 소개할 때에, 이 사람을 가리켜서 마가복음 15장에서는 루포와 알렉산더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루포라고 하는 사람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성도 중에서 널리 알려진,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루포와 알렉산더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누구냐 바로 그 아버지라고 표현할 정도라고 생각이 드니까, 뿐만 아니라 로마서 16장 13절의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무난하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이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랬을 가능성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계기가 되었겠지만, 그러나 나중에라도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신뢰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 다행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따라간 것도 아니고, 믿음이 있어서 따라간 것도 아니고, 압력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만 했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에 기쁨이 있어서 정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감사하면서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라 어떠한 압력에 의해서 억지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의 군병들의 칼이 압력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어떤 것들이 압력이 됩니까?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인정해 주는가? 그러한 것들이 압력이 되고, 또한 여러 가지 그런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이 나에게 동기가 되어서, 억지로 기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마치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주님을 따라간 것과 비슷한 것이 될 겁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구레네 시몬이 나중에 그 가족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지금은 이런 상태로 우리가 주님을 억지로 만나게 된 것 같고,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 같고, 남들의 이목 때문에 내가 여기에 나온 것 같고, 그리고 사람 관계 때문에 이곳에 나오게 된 것 같지만,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얻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는 그런 헌신의 단계까지 넘어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보면서 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면서 울면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울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울어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해야만 눈물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결국 이 울던 사람들은 누구냐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울면서 따라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나를 위해서 울어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수준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냥 주님께서 당하신 일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정말 안타까운 마음에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위해서 피 흘려주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정작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죠. 아,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구나. 그리고 내가 영적으로 다시 회복되어야만 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되겠다고 하는 그런 영적인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시급성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번 한 주간 동안 보내는 가운데 특별히 오늘 묵상하는 가운데, 정말 우리가 울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나 자신의 더러운 모습 때문에 울어야 할 것이고,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한 것 때문에 울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로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제비를 뽑아 옷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그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죠. 영원한 생명 죄에서부터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신데, 이 군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사가 무엇이냐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군인들과 같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가? 왜 내가 교회에 나오는가? 주객이 전도가 되었어요. 왜 내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런 이득이 이 세상에서 얻는 그런 만족감 안정감,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는 것,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 주는 그러한 것들에 관심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썩어질 것, 아무런 우리들에게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 그런 것들이 갈망이 되어서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세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들의 구원자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정말 내가 주님을 따르고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는 이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목적이 돼야 되는데,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그런 선물들의 눈이 멀어서 교회를 다니면서 얻게 되는 그런 여러 가지 유익들의 눈이 멀어서, 그래서 그것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 버리고, 그것이 나의 정말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방하고 또한 조롱했던 사람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죠. 생명의 주이신 그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은혜를 받을 터인데, 그 생명의 주님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리고 방관자로 무관심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비방해 버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렸던 한 행악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간청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지만, 주님을 믿고 간청하면서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할 때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그 악을 행했던 자들에게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실 이 평생을 악을 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했던 그 악인에게 낙원을 약속하는 것처럼 황당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없을 겁니다. 아무런 착한 행실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셨는데, 사실은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거든요. 우리는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악을 행한 자들일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주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생명의 주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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