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증언(1: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Ἰωάννης μαρτυρεῖ περὶ αὐτοῦ καὶ κέκραγεν λέγων· Οὗτος ἦν ὃν εἶπον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ἔμπροσθέν μου γέγονεν ὅτι πρῶτός μου ἦν)):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눅 1:24-31((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세례요한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 물론 사역이 중첩되는 기간이 있었기는 했지만(3:22-24((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하지만 예수님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태초부터 선재하셨다(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이 앞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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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아버지를 나타냄(1:16-18)((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ὅτι ἐκ τοῦ πληρώματος αὐτοῦ ἡμεῖς πάντες ἐλάβομεν καὶ 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 1:14에서 성육신하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를 받는데 차고 넘친다는 의미.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예전의) 은혜를 대체하는 (새로운) 은혜”(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로 이해할 수도 있다.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ὅτι ὁ νόμος διὰ Μωϋσέως ἐδόθη ἡ χάρι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ἐγένετο)):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었다. 만일 1:16에서 말한 것이 “은혜를 대체하는 새로운 은혜”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대체되어진 은혜는 곧 모세가 준 율법을 지칭할 수 있다. 율법도 은혜였다. 하지만 그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자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은혜를 허락해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인데,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새로운 은혜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θεὸν οὐδεὶς ἑώρακεν πώποτε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 ὁ ὢ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ὸς ἐκεῖνος ἐξηγήσατο)):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볼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품 속에 있던 로고스께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로고스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다는 표현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친밀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나타내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엑세게오마이”(ἐξηγέομαι)로서 “설명한다, 해설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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