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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과 만만(삼상 18:6-9)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러 이김으로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안정환이 골든골로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이긴 것과 같은 흥분에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오 필승 코리아”를 노래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아녀자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를 노래하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기뻐했던 바로 그 시간에 그 기쁨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여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시기와 질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이날 이후로 그의 삶의 목표가 다윗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위하여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즉흥적이고 감정에 휩싸여 창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뒤로 갈수록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산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자신의 딸 메랍을 주겠다고 하면서 블레셋과 싸우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미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윗에게 지참금을 요구하였는데, 그 지참금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그 증거로 블레셋 사람의 성기의 포피를 100개 잘라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장인에게 지참금을 가져와야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사울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사울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그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거나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게 되었을 때, 악신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리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악신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경쟁의식은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전한 경쟁의식을 넘어서서 시기와 질투의 단계로 넘어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시기와 질투로 마음이 지배당할 때, 우리의 인생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건전한 경쟁의식과 시기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경쟁의식은 자신을 개발하여 발전하게 하는 반면, 시기와 질투는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게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울의 삶은 더 이상 생산적인 일에 매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중요한 일은 다 내팽개쳐버리고, 오로지 다윗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시기심 때문에 죽게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일 시기심이 없었더라면, 다윗을 통해서 블레셋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기심 때문에 다윗이 더 이상 사울을 위해 일할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 본인이 직접 나아가 싸우다가 죽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해 좋은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과 나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은 종종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가운데 <진짜 사나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나온 장면 가운데 하나는 특공연대에 간 진짜 사나이들이 영하의 날씨 가운데 얼음물 속으로 입수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모두가 추운 얼음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지 못하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이 입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하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비교할 때에는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라고 권고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최상의 상황과 나 자신의 최악의 상황을 비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최상의 상황과 자신의 최악의 상황을 비교하면, 절망감에 빠지고, 시기에 빠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거쳐서 그런 최고점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보면서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어떤 방법/과정/전략을 사용하였는가에 집중하라고 권고합니다.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통해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전쟁의 승리가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었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승리를 보면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반응을 했지만, 사실 관점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요나단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삼상 19:5).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각각 다르게 사용하시고, 각각 일한대로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우로서 함께 전투에 나가야 할 동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적은 블레셋이지, 다윗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울 왕과 같은 현상이 교회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잘 나가는 것 같으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잘 못하는 것 같으면 비난하고 밟아버리는 게 우리의 못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할 때, 기뻐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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