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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된 요나단과 다윗(삼상 18:1-5)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다양한 반응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는 비극적인 전개도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인기가 올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고, 시기와 질투심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읽는 것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소개되기 전에,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먼저 소개됩니다. 바로 요나단의 이야기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습니다(18:3). 요나단은 사울 왕처럼 반응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이었으니까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그가 모든 백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요나단은 다윗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때 어떤 언약을 맺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삼상 20장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은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14-15) 이 내용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사울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오히려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언약을 맺어서 다윗을 보호하고, 또 나중에 다윗으로부터 보호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민족과 전투를 하러 갈 때, 다윗과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싸움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뜻 앞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욕심으로 하면 사울의 뒤를 이어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욕심이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울은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이 선하신 결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요나단은 다윗을 적대자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언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요나단과 다윗은 끝까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극진하게 대우하여 주었습니다(삼하 9:1-13).

이게 중요합니다. 적이 누구이고, 친구가 누구입니까? 친구로 만들면 나에게 유익이 되고 결국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적을 만들어버립니다. 경쟁자로 삼아버립니다. 그리고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같이 협력하고 친구가 되어준다면 좋을 텐데, 적을 만들어버리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기 자신이 떠안게 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함께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갔다면,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적으로 삼는 순간, 블레셋과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힘을 다윗을 처치하는데 쓸데없이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서 죽은 것은 사울 자신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동지들을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목사를 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같은 교우를 적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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