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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삼상 6:10-18)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놀랍게도 암소는 벧세메스의 길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누가 억지로 끈 것도 아니고 채찍으로 때린 것도 아니었는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벧세메스까지 갔습니다. 그동안 블레셋에 내린 재앙이 우연이 내려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지난 7개월간 이것은 우연일거야 하면서 미적거리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빨리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탕자가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빨리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애굽의 바로 왕이 열가지 재앙을 다 당한 후에 이스라엘을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항복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이건 우연일거야. 이건 어쩌다 보니까 일어난 일이야 하면서 미적거린 것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기 위하여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의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한 알레고리의 원조가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이 사용해왔고 또 이를 통해서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설교에서는 벧세메스로 가야 했던 암소는 멍에를 메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일에 얽메이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만이 합당하다는 것으로 적용했습니다. 또한 젖을 빨리는 송아지가 있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갔다는 것은 오직 주의 일에만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냈습니다. 아무런 요령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사역을 감당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교훈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는 점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교훈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자신의 생각을 본문 안으로 집어넣은 것에 불과합니다. 비록 전하려고 하는 교훈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교훈이었지만 말입니다.

암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간 것은 블레셋 땅에 독종이 발생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닐 것이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암소가 똑바로 진행하지 못할 환경을 만들어놓았지만, 암소는 하나님에게 이끌리어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가 자신들의 마을에 오는 것을 저항하면서 싫어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똑같은 언약궤인데 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저주의 하나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어떤 사람에게 복음은 구원의 증거가 되지만, 똑같은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될 뿐입니다(빌 1:28). 문제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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