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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를 들여다 본 죄(삼상 6:19-21)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삼상 6;19-21)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간 이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사람들이란 호기심이 많은 존재이니까, 어쩌면 그들의 마음에 언약궤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과 20절을 보면 절대로 성물을 만지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랐다고 해서 재앙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이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만지면, 몰랐으니까 화재가 나지 않고 봐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오만 칠십명이 죽었는지 아니면 칠십명이 죽었는지는 사본학적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본은 오만 칠십명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사본에는 칠십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죽었든 적게 죽었든 그것은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단 한명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두려움이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은 슬피 애곡하면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왜 법궤가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저주거리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여호와의 궤가 가스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삼하 6:11).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언약궤와 함께 광야에서 함께 했고, 그 언약궤와 함께 복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축복을 내렸던 언약궤가 저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는 언약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언제나 사람의 편에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축복의 방편으로 주셨습니다. 아내도 축복이고, 가정도 축복이고, 교회도 직장도 모두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도구들이 저주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서 아내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가 그 선악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주었다고 했습니다(창 3:12). 가정이 깨지고 서로가 원망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도구를 저줏거리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우리는 저줏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왔지만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고통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게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분이 필요합니다. 저주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안타깝게도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보내버립니다. 누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질문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쉽습니다. 언약궤 저체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 그냥 깨버립니다. 차라리 헤어지면 더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는 다른 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서 말입니다. 언약궤가 문제가 아니기에,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이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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