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소망의 반대개념은 포기이다. 하나님의 포기를 나타내는 신학용어로 “유기(遺棄)”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포기하고 버리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유기하신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포기하고 버리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죄악을 저지르고 죄악의 길로 달려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해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고, 기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하셨다. 때로는 이방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종 채찍질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반면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간과하셨다고 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않으셨다”는 사도행전 17:30의 말씀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죄악을 저질러도 심판이 없고,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시편 73편 아삽의 시는 그러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편 73:1-5)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정의의 하나님인지 회의적인 마음이 든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일 수 있을까?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Bruce Almighty]는 이 세상이 엉망진창인 모습에 불만이 가득한 뉴욕, 버펄로 지방 방송국의 뉴스 리포터인 브루스에게 1주일간 하나님의 직무를 대행시킨다. 브루스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네브라스카 주 의회의 어니 체임버스 상원 의원은 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하여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는 더글러스 카운티 지방법원에 소장을 제기하면서, 신에게 끔찍한 홍수, 엄청난 지진, 가공할만한 태풍, 무서운 토네이도, 흉측한 역병, 기근, 가뭄, 전쟁, 출산장애 등의 책임이 있다고 하면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놀랍게도 피고는 지상법률로부터 면제된다는 내용과 피고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내용의 피고의 답변서가 법정 서기에게 아무도 모르게 접수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1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소송의 원조는 시편 73편을 쓴 아삽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왜 이 세상이 엉망진창인가? 이 질문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도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닌데,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볼 때의 악인들만 잘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 죄인이며 악인인 우리들도 이렇게 행복을 누리며 산다. 그 이유는 결코 우리가 그만큼 착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악한데, 과도한 행복을 누리며 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2)
우리도 죄인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놀랄 것이 없다. 우리도 악인인데 형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리토스 장로교회 김한요 목사님은 우리가 잘 나갈 때 회개하여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이런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야할 마땅한 대우는 하나님의 심판인데, 우리는 과분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을 기억하며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가르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 5:44-45)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하나님께서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악인과 불의한 자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즉 선인과 악인을 골고루 사랑하는 “하나님”처럼 너희도 골고루 사랑하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악인”이며 “불의한 자”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그런 점에서 왜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가 라고 묻는 말처럼 교만한 말도 없다.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두 번째 대답은, 잘 살고 편안히 죽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악인을 버리셨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잘못했고, 죄를 저질렀는데도 하나님이 책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소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책망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채찍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6-8)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혹시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아닌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기대 앞에 나아가야 한다. 혹시 우리 가운데 고난이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향해 길이 참으시는 결과임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기에 책망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또한 그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고난이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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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상원의원, 재해로 하나님 고소,” 크리스찬 투데이 2007년 9월 26일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