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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

사랑은 소망을 놓지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잔소리를 하게 되고, 남편을 사랑하기에 바가지를 긁는다. 잔소리와 바가지는 결코 지혜로운 사랑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기에 무조건 잔소리와 바가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랑의 표현법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기억한다면, 잔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것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잔소리를 들을 때, 바가지 긁힘을 당할 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야 한다. “(사랑의 방법은 틀렸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잔소리가 듣기 싫다 생각했는데, 부부 싸움을 하고 난 어느 날 아내로부터 잔소리가 뚝 그쳤다. 바가지가 그친 것이다. 그렇게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잔소리를 해야 할 순간인데도, 아내는 나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데모였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는 사랑의 14번째 정의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13번째 정의와 연관이 있다.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조건 신뢰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 믿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고, 소망이 없어 보여도,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이 모든 것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기대한다는 사랑의 14번째 정의와 통하는 것이다.

소망이 없으면 죽은 것과 같다. 만일 소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자살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소망을 발견할 수 없기에 자살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을 보면 지옥 문 앞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은 모든 소망을 버려라.” 단테가 지옥에 들어가 확인해본 적이 없었겠지만, 그가 쓴 표현은 아주 의미가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누가 젊은이이고, 누가 노인인가?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젊은이이고, 후회만이 있는 사람은 노인이다.” 85세의 갈렙은 육신으로는 노년에 속했으나, 그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소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외치며 나아갔다 (여호수아 14:10-12).

사랑은 기대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기대를 갖는다.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 속에서 우리는 그 아이가 커서 위대한 성악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미래가 보이는 것이다. 주전자에서 항상 나오는 증기를 보면서, 와츠(Watts)는 증기 기관차를 볼 수 있었고, 로댕(Rodin)은 바위 속에서 생각해 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요리사는 재료 속에서 갖가지 맛있는 요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고, 설계사는 황량한 벌판에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이다. 현재만을 보고 절망하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사랑은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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