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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는 종종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지고 있던 소망을 접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인데, 그 아픔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사랑은 아픈 것이고, 사랑은 괴로움을 동반한다. “가지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우리 속담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괴로움의 바람은 많다.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괴로울 일도 없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괴로움이 있어도 되니, 자식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원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자식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다. 덩치가 몹시 큰 그분은 마치 나무꾼이나 대장장이같은 인상으로 내게 비쳤다. 강인해 보이는 그분이었지만, 한없이 나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의 가게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분은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흘렸다. 아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모든 것을 투자했지만, 대학에 들어갔다가 잘못된 길로 빠져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아주 컸다. 아들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달 뒤, 그 아들이 그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합니까? 아들인데요!” 그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자식에 대한 소망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결코 버릴 수 없게 되어 있나보다.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포기하기 쉽다. 친구에 대한 우정도 포기하기 쉽고, 교회나 성도에 대한 애정도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 의지이다. 의지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힘이 없는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야 사랑이다.

영국의 문필가이며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랑하는 것(to love at all)은 반드시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내놓는 것(to be vulnerable)이다. 어느 것이든지 사랑하면, 그대의 마음은 분명 아프게 될 것이고, 어쩌면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만일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면, 마음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 심지어 애완견에게 조차도 주지 말라. 마음을 취미와 약간의 호화로 조심스럽게 싸라. 모든 혼잡한 것을 피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기심이라는 관(coffin)에 안전하게 싸서 잠가두라. 하지만 안전하지만, 어둡고, 미동도 없고, 공기도 없는 그 관 속에서 변하게 될 것이다. 다치지는 않을 것이지만, 부술 수도 없고 관통할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1

우리는 소망을 포기하면서 여러 가지 그럴듯한 변명을 내세우지만, 소망과 기대를 포기하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가 이기심으로 가득찬 죄인이기 때문이다. 소망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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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S. 루이스, [네가지 사랑] (홍성사, 2005), 207. 인용은 영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The Four Loves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0),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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