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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희망이란 절망적일 때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무슨 덕목이 되겠는가? 오직 희망적일 때에만 희망적이라면 희망이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에라야, 희망이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G.K. 체스터톤, 1874-1936)

이 세상의 중요한 것들 대부분은 전혀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순간에도 계속해서 노력해온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데일 카네기, 1888-1955)

– 이국진

사랑은 기대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사랑의 14번째 정의는 규정한다. 사랑은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다. 만일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남편이기에 기대가 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기에 그들에 대한 기대가 있다. 지나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바랄 것은 거의 없다.

사랑을 이렇게 정의할 때, 사랑의 7번째 정의와 약간의 모순이 있어 보인다. 7번째 정의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위해선 사랑의 대상에게서 무엇인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가를 기대하는 사랑은, 혹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14번째 사랑의 정의(모든 것을 바라며)와 7번째 사랑의 정의(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기대하게 되어있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 있기 때문에 기대하게 되어 있다. 사실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냉정하게 들리는 말도 없다.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섭섭하게 들리는 말도 없다. 우리가 기대하는 사람은 그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며,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의 기대치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과 기대는 정비례한다. 우리는 기대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고, 자녀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 그러한 거슬리는 행동을 보게 될 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잔소리가 과연 사랑을 표현하는 현명한 방법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으니, 잔소리해야 할 상황에서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사랑하는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국에서 자라는 2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부모들이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취향이나 재능과는 관계없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영어를 잘 못해서, 이렇게 미국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2세들은 영어도 되겠다, 문화도 알겠다, 막힐 것이 없으니, 미국 주류 사회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는 종종 심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와서, 자녀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교육학에서는 이러한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자녀들을 망친다고 분석한다.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에 부모의 지나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한 자녀들은 과도한 기대에 짓눌려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고 분석한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성격, 취향, 재능과는 상관없이 기대하는 것)는 잘못된 것이지만, 자녀들은 부모들의 기대를 먹고 자라게 되어 있다. 부모들의 기대가 없다면, 자녀들은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언젠가 고아원을 취재한 방송을 시청한 적이 있다. 거기서 고아들에게 기자가 물었다. 만일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고아들은 소박한 꿈을 말했다. “만일 아빠를 만나면, 내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 보여주고 싶어요!” 자기를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는 부모가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 집 둘째 아이가 여름 방학 동안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바꾸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엄마는 둘째 아이에게 방학 내내 오른손으로 쓴 것을 가져와서 아빠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그것을 본 나는 너무 놀랐다. 벌써 7학년이 되었으니, 왼손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데, 그것을 방학 내내 연습하여 바꾸어버린 것이다. 나는 왼손잡이가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왼손잡이라고 하여 무엇인가 잘못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왼손잡이이든 오른손잡이이든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가는 문화 구조에서는 오른손잡이가 훨씬 더 편리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내 아이가 왼손만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오른손까지 쓸 수 있는 아이가 되는 것을 더 바랬었다. 하지만 쉽게 고치지 못해서 시도하지 못했고, 혹시나 왼손잡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받지 말아야 할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시도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 면에서는 왼손잡이나 오른손잡이나 차이가 없지만, 오른손으로 길들여진 문화 속에서 오른손 사용이 가져오는 편리함과 유익함에 대하여 아내는 아이에게 설득했고, 아이는 손을 바꾸는 어려운 시도를 했다. 아이는 오른손을 연습하면서, 많은 유익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로 하여금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가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대견해 하는 부모를 생각하면 그까짓 어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의 노트를 보면서, 또 하나의 선물을 했다. “아메리칸 이글” 옷을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에 대한 기대는 아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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