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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비유의 단점

하지만 비유는 장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다. 이 단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비유는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단점은 비유는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비유에 불과하며 실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숭이가 인간을 99% 닮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다른 1%의 차이점 때문에, 인간을 원숭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한참 부족한 설명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점이 아무리 작더라도 말이다. 1

물론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계인에게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 외계인이 이미 잘 알고 있던 대상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체는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말하면, 지구를 방문한 적이 없는 외계인은 지구의 생명체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결코 인간을 제대로 설명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원숭이와 닮았다 해도 원숭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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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의 음식을 소개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빈대떡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국 사람들에게 빈대떡을 설명할 때에는 종종 한국식 피자(Korean Pizza)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미국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피자를 사용해서 설명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빈대떡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미국인은 그나마 빈대떡이 넓적하고 동그랗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빈대떡을 한국식 피자로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도 부족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비유가 지니고 있는 단점이다.

두 번째 단점은 비유는 종종 화자가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마저도 전달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 큰 위험일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비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완고한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비유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고백할 때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인데, 종종 하나님은 사람들의 복지에는 관심이 없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이 비유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단점이다.

세 번째 단점은 종종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비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정말 확연히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카메라로 눈으로 덮인 땅을 촬영했는데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진을 본 수많은 사람이 “정말 예수님의 얼굴이네” 하면서 감탄을 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그 얼굴의 형상을 알아채지 못한다. 비유도 비슷하다.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뚜렷하게 이해될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유는 필연적이다. 하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선, 이 세상의 유비로서만이 설명이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들을 생각하면서 비유를 조심스럽게 해석해 나간다면, 비유는 우리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언제나 그렇지만 비유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저주가 되고야 마는 것처럼, 비유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1-12)고 하셨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렇듯이 비유도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즉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반면, 또한 어떤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놀라움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 바 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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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이 단락의 표현은 내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김세윤 교수의 강의에서 자주 들었던 표현이다.[]
  2. C. H. Dodd는 이 구절은 예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복음서 기자가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을 개종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답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Scribner, 1961), 14-16. 반면 T. W. Manson은 이 구절이 예수님에게 유래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원래는 아람어 탈굼 이사야 6:9-10의 의미가 “···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라기보다는 관계 대명사(who)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이 구절은 비유에 숨기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였다는 서술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T. W. Manson, The Teaching of Jes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78.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이 구절은 원래 현재의 문맥과는 상관이 없는 독립된 것으로, 단순히 제자들에게는 비밀이 주어진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아리송하게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아킴 예레미아스,『예수의 比喩』(분도출판사, 1974), 11-16. 그러나 마가복음의 맥락 속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비유가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비유를 통해서 쉽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져 영적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것에 반하여, 오히려 비유의 또다른 기능 때문에 (나는 이것을 비유의 단점으로 표현하였다) 영적인 혜택을 박탈당하는 사람도 있음을 나타낸다. cf. 김득중,『복음서의 비유들』(컨콜디아사, 198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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