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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기쁘게 (롬 15:1-3)

지난주에 임시 노회가 있다고 해서 노회를 한번 참석했었는데요. 보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분란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런 임시노회였습니다. 참, 좋은 일이 아니라 싸우고 분쟁하고 다투는 일이어서,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는데요. 종종 교회 내에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노회는, 그리고 교회의 당회는 그리고 총회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모임에 이런 갈등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완벽해지기 전까지는, 늘 부족한 게 있을 수밖에 없고, 여러 가지 연약한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 공동체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건 오늘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로마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교회 내에, 처음에 복음이 그렇게 생생하게 전해지던 그 시절에도, 늘 좋은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갈등, 여러 가지 분쟁,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권면하고, 그 성도들을 잘 이렇게 권면해 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14장을 살펴보면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를 향해서 들려주었던 그 권면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로마서 14장에서 해주었던 권면의 말씀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내가 옳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아무리 내가 옳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근심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나의 그 옳은 주장을 좀 양보할 수 있어야 된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권면을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기억 안 나셔도 괜찮습니다. 로마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음식을 먹는 문제 때문에 의견들이 서로 갈린 것이죠. 어떤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어도 괜찮다. “아무 문제가 안 된다”라고 하는 그런 강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의 사람들은 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연약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그런 로마 교회를 향해서 권면하면서,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기를 뭐라고 권면했습니까? “너희들이 옳으니까, 끝까지 밀고 나가라.” 그렇게 권면해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괜찮고, 그것이 바른 입장이긴 하지만,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을 배려하고, 차라리 고기를 먹지 마라. 고기를, 차라리 고기를 먹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 옳음 때문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나의 옳은 주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고, 내 옳은 주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정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5절의 말씀이죠.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내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내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내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아무리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담대한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고, 그 사람들을 망하게 만든다면, 너의 옳음이 잘못이 되는 것이다.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죠.


아무리 내가 옳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16절의 말씀이죠.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옳은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 하는 것이고, 그 악한 일을 하는 거라고 하는 비방을 듣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해 주고 있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내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어라.”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만 그걸 가지고 있고,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옳다고 하는 그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그래서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평가를 받지 말아야 된다. 그렇게 권면해 준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정당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당한 것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우리 자녀들을 훈육할 때 아이들이 분명히 잘못을 했어요. 아이들의 행동을 고쳐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아이들을 훈육하고 부모님이 자녀들을 훈육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당한 일이 잘못될 때가 있어요. 언제입니까? 폭력적이 될 때, 아이들을 학대하게 될 때. 종종 우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뉴스로 듣습니다. 선생님이 또는 부모가 그 아이들을 훈육한다고 하는 것이, 과도하게 훈육을 해서, 그래서 아이들을 정말 다치게 만들거나, 심지어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뉴스를 듣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시행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악한 일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어떤 나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마 옳은 일일 겁니다. 시시비비를 바르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나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오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잘못될 때 무엇이 되나요? 갑질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갑질이 문제가 되는 사회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과 분쟁들이 있을 텐데 왜 갈등과 분쟁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나의 주장을 하고,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다른 성도들과 싸우는 일들이 있을 텐데요.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좋은 결과가 발생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되고, 그래서 완전히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들을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어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가? 로마서의 권면을 주의 깊게 주목을 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우리들이 기억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잘 적용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분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아마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이고 다투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로마서 15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말씀, 로마서 14장에서 했던 그 말씀들을 계속해서 이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5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로마서 15장 1절 2절 말씀에서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우리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런 강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신의 주장을 그냥 밀어붙이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그 약점을 어떻게 하라고요? 1절 말씀에 보면 “담당해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담당하라고 하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약한 자의 약점을 “참고, 인내하고, 봐줘라” 그런 이야기예요. 그렇게 번역을 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는데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노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싸울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해 주어서, 잘 참으라고 하는 권면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 주장을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 우리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는 그런 삶을 살아라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항상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입장을 잠깐 유보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아량이 오늘 우리 모두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이웃을 기쁘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 된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될 텐데요. 첫 번째,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때 그 한계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 대수롭지 않은 것. 그것을 전문 용어로 성경에,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용어로 뭐라고 그랬죠? 대단합니다.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입니다. 1부 때는 다 잊어 먹었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아디아포라가 뭡니까? 아디아포라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령하거나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한 것이 아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많잖아요?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예배를 10시에 드려야 되느냐? 11시에 드려야 되느냐? 그것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죠. 그런 아디아포라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주장을 들어야 돼요?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들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 그것은, 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지금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도 썼고, 로마서도 썼는데, 이 두 구절의 말씀이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내 기쁨을 내 만족을 취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해야 된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는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면서 살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경우가 다른 것이죠.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음식에 관한 문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내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문제는 어떤 이야기입니까? 본질적인 문제죠. 핵심적인 문제인 겁니다. 이런 문제는 양보를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의 문제까지 타협하면서 양보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갈라디아 교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변질시키는 게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지 않고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고 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들을 존중해 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쫓아냈어요. 그런 사람들과 싸웠어요. 왜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고, 만일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면, 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요.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있습니까? 들어주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까? 들어주지 못하는 게 있고, 들어줄 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에 따라서 양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아빠는 이탈리안 음식을 먹고 싶은데, 아이들은 짜장면 먹고 싶다고 하면, 어디로 가야 돼요? 짜장면 먹으러 가야 되는 거죠. 왜? 이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그런 경우에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되는 것이죠. 내 생각에는 우리 아이가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잘 알아서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경우에는, 내 주장을 밀어붙일 게 아니라,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이들을 기쁘게 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배려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게 성도의 바른 자세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게 있는 겁니다. 아이들이 와서 말하기를 “나 독약 마셔도 돼?” 하면, “그래, 마셔” 할 수 있나요? 아니요. 생명에 관련된 것이니까 그건 뺏어야 되는 거예요. 이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죠. 아이가 도둑질한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살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죠.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지금 로마서에서는 이웃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갈라디아서에서는 내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죠.


두 번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만족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기쁨, 나의 만족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어쩌면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보다 더 섬기고 싶어 하는 것이 “내 만족”이죠.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될 때가 많이 있는데,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런 만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자기만족을 내려놓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를 부인하는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내가 만족한 그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만족이 아니라,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일이 무엇인지를 배려하면서 사는 게 그게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4장 22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르되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 성도의 삶은 편한 삶이 아니라 환란을 겪는 삶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편하고 내가 만족한 삶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양보해야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고통을 당해야 되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 나를 부인하면서 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이웃을 기쁘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그런 선택들을 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까? 결국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로마서 15장 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왜 양보해요? 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어떤 공동체든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이든 아니면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이든 아니면 직장이라고 하는 공동체이든 우리가 어느 공동체 속에 있든지, 내 주장을 하면서, 내가 옳기 때문에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나의 옳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그것이 바른 길이 아니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라고 한다면, 내 주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귀 기울이고, 그 사람들을 기쁘게 이웃들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아마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왜 나만 참아야 됩니까? 왜 나만 손해 봐야 됩니까?” 그렇게 말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한 번 제가 예배를 마치고 뒤에 서서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요. 어떤 성도님 한 분이 나가시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발 그런 설교 좀 하지 마세요.” 그래요. 왜 그렇습니까? “제 마음이 찔려 죽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어쩌면 그게 우리들의 아마 모두의 그런 감정일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만 손해 봐야 되는 거죠? 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삶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됩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로잡고 모든 것을 옳게 만들어주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은혜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모든 공동체에 갈등이 있듯이,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 가운데서도 갈등이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 갈데아 우르 지방에서 가나안 땅으로 나올 때, 아브라함과 롯은 정말 둘도 없는 정말 좋은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겁니다. 저 이방 땅에서 친척이 있다고 하는 것, 저 이방 땅에서 친족이 있다고 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서, 이 아브라함과 롯은 늘 함께 잘 지내면서 살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관계 속에서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무엇 때문에 갈등이 생겼습니까? 재산 때문에 갈등이 생긴 거죠.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서로 좋은 풀밭에서 서로 좋은 물을 먼저 자기들의 양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두 목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툼이 일어나게 된 거죠. 제가 작년에 이스라엘에 가서 그 가나안 땅을 보니까 그럴 만하더라고요. 왜 이스라엘 땅을 가보니까 풀이 많지 않아요. 뉴질랜드에 갔을 때는 온 세상천지가 푸릇푸릇해서 양들이 그 풀들을 먹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던 반면에, 가나안 땅은 어떤 땅인가 가보니까, 푸른색이 별로 안 보여요. 전부 자갈들, 황량한 벌판이 너무나도 많이 펼쳐져 있고, 그 풀들은 어디에 자라고 있는가? 저기 물이 조금 있으면 거기에 조금 자라고, 또 한참 가서 저기에 물이 조금 있으면, 거기에 풀들이 조금 자라고, “정말 황량한 땅이 가난한 땅이었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양들을 서로 먹이기 위해서, 이 목자와 저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거죠. 그런 가운데 어떻게 할 것인가? 아브라함과 롯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향해서, “야, 너, 내 조카 아니야? 장유유서야. 꺼져.” 이야기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롯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선택을 해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테니까, 네가 먼저 선택을 하면, 내가 나머지 땅을” 갖겠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롯이 그 순간에 싹 살펴보니까, 좋은 땅이 있어요. 풀이 많이 자라고 양들을 치기에 너무나도 좋고, 살면 좋은 너무나도 좋은 땅이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내가 이곳을 차지하겠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어디를 차지하게 됐습니까? 황량한 벌판을 차지하게 된 거죠. 양을 먹이기에 어려운 땅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먼저 양보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는, 너무나도 척박한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내가 이 땅을, 네가 밟는 곳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말씀하시고, 네가 망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고, 나는 한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아브라함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양을 치는 가운데 물이 필요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 땅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물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양들을 먹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하는 겁니다. 이 땅은 우리 땅이야 꺼지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판 우물인데, 내가 힘써서 판 우물인데, 그 우물을 자기네들이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그때 그 이삭은 그 사람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그걸 놓고 다른 데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이 나올 수 있을까? 또 땅을 봤는데 놀랍게도 또 우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잘 됐구나” 생각하면서, 거기서 지내려고 하는데, 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 땅도 우리 땅이다.” 저리 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판 우물을 빼앗기는 거예요. 놀랍게도 이삭은 포기하고 다른 데로 갑니다. 그러기를 몇 번씩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가는 곳마다 또 나오게 하시고, 결국 그것을 본 그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삭 앞에서 약조를 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 서로 약조를 맺자. 서로 전쟁하지 않기로 하자. 너와 함께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봤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내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 사람의 만족을 추구해야 됩니까? 왜 우리가 손해 봐야 됩니까? 왜 우리가 포기해야 됩니까? 그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결국에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되는가? 내가 내 손으로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그럴 때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물어보는 거죠. 왜 당신은 포기합니까? 왜 당신은 당신의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까? 왜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먼저 선택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참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손해 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손해 보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 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만일 예수님의 이익을 추구하신다고 하셨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도 손해 보지 않기를 원하셨다고 한다면, 당장에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와 천군들을 동원해서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그 군인들을 한꺼번에 다 몰살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체포하러 오는 그 악한 무리들에게 순순히 잡혀가시고, 재판을 통해서 어거지 재판, 불법 재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재판들이 이루어지는 그 재판정에서, 하늘에 불을 내려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이웃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가 부부 사이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그 어느 환경 속에서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한 여러 가지 갈등과 분쟁 다툼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신 것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택을 해 나가는 그런 귀한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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