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잠언서 17장 11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데요. 오늘 말씀에 보면 “악한 자가 반역을 한다.” “악한 자가 반역만 힘쓴다”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반역을 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요? “악한 자다” 이 말입니다. 반역을 꾀하는 사람이 누군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람이 누군가?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씀이 오늘 잠언서 17장 11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고 하면 누구를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압살롬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쫓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던, 반역을 꾀했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거짓으로 다윗에 대해서 모함을 하고,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에게서 빼앗아 가지고, 결국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차지하려고 하는 그런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요? 백성들을 위해서 반역을 일으킨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분명히 말을 했을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그 말로, 다윗은 여러분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지만, 여러분들을 위한 섬기는 왕이 되겠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백성들을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압살롬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 반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쿠데타가 다 그렇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는 다 아주 그럴듯한 명분을 내거는 거죠.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혹은 혼란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도탄에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그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마음 가운데서,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잠언서 17장 11절의 말씀 가운데서 압살롬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은 결국 “악한 자였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잠언서 17장 11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무 위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떤 쿠데타들은 성공할 겁니다. 어떤 반역은 성공할 겁니다. 이 씨 조선을 일으켰던 그 반역도 성공을 했고, 이 세상에 수많은 반역들이 쿠데타들이 성공을 했고, 그렇게 성공을 하게 되면, 역사가들은 성공한 자의 편에 서서 역사를 쓰기 때문에, 그 쿠데타에 대해서 좋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누가 반역을 추구하는가? 누가 반역을 꾀하는가? “악한 자다”라고 하는 것이 잠언서 17장 11절의 말씀인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우리는 반역을 할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권세에게 순종하고, 그리고 협력하는 것이 그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마땅한 자세라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3장 1절과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렇게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보았을 때 그 사울 왕이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그 사울 왕은 자격 미달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왕 대신에 다윗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을 뒤엎어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울이 왕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한, 끝까지 협력하려고 했고, 존중하려고 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해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복종하지 않고, 우리가 만일 반역을 일으키거나 다투게 된다고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부터 15절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우리가 싸우게 된다고 한다면, 협력하고 그리고 복종하고 함께 한 뜻을 마음을 맞추어서, 그래서 한 방향으로 같이 나아가지 아니하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위에 있는 권세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고 하면, 물고 먹기 시작하면, 그러면 그 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피차 멸망하는 결과가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협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협력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며, 만일 반역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대적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잘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마찬가지죠. 가정에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정에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다투고 싸울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서로 양보하면서 내 자신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에베소서 5장 20절에서 2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어떻게 하라? “피차 복종하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피차 복종하며, 한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가야 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그래서 상대방을 제압해 버리고, 내 주장 내 뜻대로 그 가정을 억지로 이끌고 나간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고통스러운 그런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피차 복종하며 피차 협력하는 가운데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투고 싸울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복종하고, 그리고 함께 협력하는 마음이 우리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 있어야 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으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세례를 받을 때 질문하면서 서약하게 되는 내용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당회의 다스림을 복종하고 순종하겠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읽고 또 그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하는 그런 신앙적인 질문도 물론 하거니와,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치리, 교회의 다스림을 내가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그리고 함께 협력하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요.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가정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에 부모님이 있고 자녀들이 있어서 자녀들을 위해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훈련하고 징계하기도 하고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때,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순종을 잘하면서, 그래서 영적인 성숙을 해 나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도 영적인 가정과 같아서, 그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 당위의 권위 앞에 성도들이 순종하고 복종할 때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에, “당회의 그 다스림과 지리에 복종하겠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서약을 받게 되겠는데요. 교회에서도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가? 교회에서도 대적하고 거부하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선하신 그 인도하심이 있다고 한다면, 신실하게 복종하고 따르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우리 모습을 보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 내에서 협력하기보다는, 서로 분쟁하면서 다투고 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다툼이 없고 분쟁이 없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나 조금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정말 많은 교회 내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분쟁하면서 망해가는 경우가 있는데요. 서로가 상대방을 욕하고 그리고 비난하면서, 당회의 권위는 무너져버렸고, 그 어떠한 그 다스림도 치리도 거부하면서, 서로 양편으로 나뉘어서 혹은 세 편으로 나뉘어서, 서로 다투면서, 교회가 망해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는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젊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에서 실망하고 낙담하고 떠나는, 그런 안타까운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이 양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적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도 안 써요. 한 영혼이 죽어나가든 말든,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내 주장을 내세우면서, 그래서 내 주장대로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서로 싸우면서 그렇게 다투는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바로 세워야 되기 때문에 그런다고 말은 하고 있는데, 그런데 가만히 옆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정말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쪼개어 나누어 줘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 가짜 엄마처럼,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교회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더라도, 내 주장을 강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반역하고 대적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을 잃어버리는 그런 영혼들에 대한 전혀 애통함이 없이, 그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서, 자신의 정당성이 인정받기 위해서, 그래서 악을 행하고 있는, 그 성경,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악한 자가 반역을 일으킨다고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악한 자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마치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인 것처럼, 탐욕 가운데, 협력을 모르고 대적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데요. 사랑하는 우리 예수비전교회 성도님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반란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반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다 악한 것이고, 전적으로 다 나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요? 오늘 잠언서 17장 11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아무튼 무조건 반역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대적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다 악한, “대적하는 사람이 악한 것이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근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별히 잠언서의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잠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모든 경우에 다 그렇다고,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다, 다 그렇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악한 자가 반역만 힘쓴다고 했으니까, “반역에 힘쓰면 전부 다 악한 사람이다”라고,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원론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원칙적인, 일반적인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대적하는 것들은 다 탐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악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것이고, 무엇이 좋은 것인가? 대적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협력하고 같이 같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마음을 합하는 것이 그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일반적인 원리에서 말씀해 주고 있지만 때로는 대적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적해야만 하는 경우도 간혹 가다가 발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그럴까요? 어떤 경우가 그러냐면, 지금 위에 있는 권세가 사악한 권세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그 사악한 권세에 복종하고 순종하고 따라서 시키는 대로 다 그 사악한 권세에 협력하는 것이 당연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로마서 13장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로마서 13장의 말씀 가운데서,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러니까 위에 있기만 하면, 그 위에 있는 권세가 선한 권세이든지 악한 권세이든지, 선한 일을 위하고 있는 일인지, 그런데 악한 일을 하고 있는 그런 권세인지, 그거 분별할 필요 없이, 그냥 위에 있으니까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 “위에 있으니까 무조건 복종해야만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에서 13장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이야기는 비록 지금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 정권은 그 위에 있는 권세는 물론 나쁜 권세였을 겁니다. 믿음을 가진 권세가 아니라, 악한 권세였고, 로마 황제의 숭배를 강요하는 그런 정권이었고, 그리고 여러 가지 악한 일을 많이 하는 그런 정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그런 악한 일에 동조해도 괜찮다. 우상을 섬겨도 괜찮고, 황제 숭배를 해도 괜찮고, 위에서 시키는 것은 무조건 다 따라서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정권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순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닌 다른 일반적인 모든 통치가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세금을 거두어서 그래서 정부로서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여러 가지 법칙들을 시행하고 하는, 그런 누가 봐도 이것은 정당한 그런 국가의 임무들이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악한 정권이라고 해서 거부하고 대적할 게 아니라, 우리가 순종해야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지, 악한 것까지라도 복종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종종 오해해서 오늘 잠언서의 말씀이나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종종 오해해서, 악한 정권에 협력하고 동조하며, 그래서 결국 악한 자들의 종이 되어버린 경우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거부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히틀러는 어떻게 악한 정권을 탄생시켰고,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악한 일을 했는가? 히틀러는 어떻게 그렇게 나쁜 왕이 나쁜 대통령이 되었는가? 수상이 됐는가?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악한 일을 한 게 아니에요. 그 히틀러 혼자만 그렇게 악하게 둘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 밑에서 모든 그 이익을 받으면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히틀러의 뜻에 따라서, 악한 일을 계속해서 집행했던 수많은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악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우리 성도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잘못되고 사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협력하고 동조해버린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히틀러와 똑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반적인 원칙은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반드시 대적해야만 하고, 복종하지 않아야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과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실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따라가야 할 것인가? 그걸 정하는 것이 어려운 거예요. 신앙생활이 쉬운 것이 아니라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동시에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어느 수준에서 내가 협력을 할 수 있을지, 어느 수준에서는 협력을 할 수 없을지에 대해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협력해야만 당연한 것이고, 어떤 때는 거부해야 당연한 것이 있어서, 과연 어떤 어느 상황에서 저항해야 하는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는 협력해야 되는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이 수준에서 저항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더 낮은 수준에서 저항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사람들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이 순간에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될 것인가? 그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 이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정말 이런 힘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은 협력할 때인지, 아니면 거부해야 될 때인지,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되는지,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잘 분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고민해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당시 제사 제도가 썩어져가고 있고, 그리고 타락해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냥 그런 제사 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그냥 가만히 두고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있었고 그 성전의 관리들이 있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이 있어서, 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제사 제도가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권세가 높기 때문에 그들의 권세를 인정하면서, 그냥 순응하면서 지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았고, 성전 안에서 동전 바꾸는 그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어버리면서 이 성전을 무너뜨려버려라. 내가 다시 3일 만에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권세에 도전하시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에 타락한 교회의 시스템을 보면서, 저 교황의 권세가 있고 추기경과 신부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권세 밑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그들이 하라는 대로, 그냥 가만히 순응하면서, 그들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시켰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이것이 잘못되었다. 이것은 순 엉터리 가르침이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동떨어진 미신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저 천주교의 모습을 뒤덮어버리고,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을 밝혔던 것이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고민해야 되는 것이죠. 신앙생활이 쉽지가 않은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고 했기 때문에 반역 안 하기만 하면 장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반역을 안 하고 협력하고 순종해야 되는 반면에, 어떤 경우에는 뒤집어 버려서 바른 길을 만들어야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반역을 해야만 하는 그런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가 고민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반적인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상적인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다윗 왕과 같은 그런 정상적인 왕이 있고, 또한 우리 가정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그런 가정이 되어가고 있을 때,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냥 내 주장을 내세우면서 반역하고 대적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래서 망해버리는 그런 교회가 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반역을 일삼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잠언서 17장 11절 말씀에 보면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는데 사자가 뭐죠? 동물의 왕국 라이언(lion)이 사자입니까? 그걸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의 사자는 그런 짐승 사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런 심부름꾼, 사신, 사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죠. 우리가 한국말 성경을 읽으면서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야 되는 겁니다. 사자가 나오면 이게 짐승 사자인지 아니면 메신저 사자인지 구분해야 되고요. 부자라고 하는 말이 나오면 부자가 돈이 많은 부자인지 아버지와 아들 부자인지 구분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되는데요. 여기서 나오는 사자는 뭐냐 하면 짐승 사자가 아니라, 반역을 꾀하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올 것이다. 잔인한 사자의 예가 무엇이 있었죠? 그 옛날 출애굽 시절에 초태생들을 죽였던 그런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그날에 그 집 문설주의 피가 발리지 않은 집에는 찾아가서, 첫 아이들을 모두 다 죽여버렸던, 그 잔인한 사자와 마찬가지로 반역을 일삼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반역을 통해서 대적하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교훈의 말씀을 오늘 해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협력하는 것이 반역하는 것보다 낫고, 우리 가정도 교회도 이 나라도 협력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갈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의 마음은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협력하기보다는 거부하기가 쉽고, 대적하기가 쉽고, 그리고 내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려고 하는, 그런 타락한 심성들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제 마음을 바꾸어 주셔서, 이렇게 어리석은 반역만을 일삼는 악한 자가 되지 아니하도록, 제 마음을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