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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재판 (왕상 3:16-28)

혹시 토비 도슨이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토비 도슨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생소한 이름처럼 들리죠?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의 겨울 올림픽에 참여한 스키 선수이고, 메달리스트인데요. 그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에서 훌륭한 스키 선수가 되어서, 그래서 메달을 딴 아주 유명한 그런 스포츠맨이 된 사람이 토비 도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친부모를 찾는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내가 예전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나의 진짜 아버지 나의 진짜 어머니를 찾는다”고 하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내가 아버지다”라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서로 자기가 부모라고 그렇게 주장해서, 결국 친부모 찾는 것을 포기하는 그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진짜 아버지가 나타났는데요.

김재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사진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닮았습니까? 닮았어요. 사람들이 김재수 씨에게 토비 도슨이 자기 아빠를 찾는다고 하는데 너와 얼굴이 비슷하다고 말해주고, 그래서 이 사람의 둘째 아들도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과 정말 얼굴이 너무 많이 닮아서, 결국 이 얼굴만 봐도 아 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무슨 검사를 했을까요? DNA 검사를 한 것이죠. DNA 검사를 해서 이 사람이 정말 이 김재수 씨의 아들, 그 옛날 부산에서 엄마가 시장에 데리고 갔다가 잃어버린 이후로 한참 동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바로 그 아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밝혀져서, 그래서 그 두 사람이 만나는 그 장면이 참 감동 깊게 보여졌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 기억나시나요? 아마 기억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인 솔로몬의 시대에는 DNA 검사도 할 수가 없었고, 얼굴의 생김새를 가지고 누가 진짜 엄마인지 누가 진짜 부모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그 갓난아이를 두고서, 두 여인이 다투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열왕기상 3장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 앞에 창기 두 사람이 나와서 한 아이를 두고서, 서로 자기의 아이라고 우기는 그런 일 가운데 있었는데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솔로몬이 진짜 엄마를 찾아줄 수 있었을까요? 정말 난감한 상황입니다. 얼굴을 봐도 다 비슷해 보입니다.

예전에 우리 아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어렸을 때 아기 사진을 가져오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과제를 내줬습니다. 그래서 그 아기 때 사진들을 쫙 걸어놓고, 그리고 누가 지금 현재 이 아이가 서로 맞추는 게임을 학교에서 하기 위해서 아이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미국에 갈 때 그냥 이민가방 한몇 개 들고 갔기 때문에, 사진을 아무것도 가져간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옆동네에 있는 다른 목사님 아기의 사진을 학교에다 제출을 했어요. 제출했더니 이게 바로 우리 어렸을 때 모습이라고 맞히곤 했었는데요. 만큼 조그마한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상태였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솔로몬은 모성애를 근거로 이 “누가 진짜 엄마인가?”라고 하는 것을 찾아주어서, 그래서 솔로몬의 재판이 아주 유명해진 그런 이야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됐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재판을 아주 잘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솔로몬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 열왕기상 3장 2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아마도 그 이전에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솔로몬을 무시하는 마음들이 있었을 겁니다. 저 사람이 우리들의 왕이라고 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솔로몬이 왕위에 등극한 그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20살 전후에 왕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렇게 젊은 사람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 왕을 보면서 존경함이나, “우리의 왕이구나” 하는 그런 인정을 하게 되는 게 아니죠. 왕은 어때야 좀 인정이 됩니까? 저처럼 좀 머리도 하얗고 좀 뭔가 인생에 연륜이 있어 보여야, 그래야 인정할게 하게 되겠는데, 새파란 애송이 같은 사람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린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왕이 등극한다고 해서 왕의 권위가 인정받는 게 아니라 언제 인정을 받게 됩니까? 대관식을 통해서 왕이라고 전 민족에게 모든 백성에게 이분이 우리의 왕이라고 인정하면, 그러면 인정을 받게 되나요? 그게 아니죠. 그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고, 주로 옛날 왕정시대 때 고대 세계에서 왕이 인정받는 방식은 전쟁을 통해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군대들을 이끌고 가서 외적을 무찌르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때 아 이 왕이 우리들의 진정한 리더다. 이 왕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왕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든 백성들이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 사울 왕도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 사울 왕을 인정했느냐고 하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된단 말인가? 특별히 이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당시 베냐민 지파는 아주 멸시 천대를 받는 아주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지파 가운데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울왕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민족의 공격을 당하게 되었을 때, 사울은 군인들을 이끌고 가서 그 암몬 민족으로부터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그런 전공을 세우게 되자,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사울이 우리의 왕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죠. 다윗 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 왕도 여러 전쟁을 통해서 골리앗을 무찌르고 블레셋 사람들을 무찌르고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다윗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는 전쟁이 없었습니다. 강대국이었고 아무런 전쟁이 없던 그 시기에, 솔로몬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가? 이런 재판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판결함으로써,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열왕기상 3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한번 사건을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는데요. 두 여인이 왕에게 나와서 진짜 아기 아기의 부모라고 서로 주장하고 있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왜 어떻게 엄마가 잠을 자면서 모르고 자신의 아기를 깔아뭉개 죽일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엄마라고 한다면 아기를 건드리기만 해도, 아이의 살갗이 닿기만 해도, 그 아이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모성애이고, 그렇게 민감하고 예민해서,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려고 하는 게 그게 엄마의 마음일 텐데, 어떻게 엄마는 자기 아이가 자신의 몸에 깔려 죽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잤을까? 그리고 또 다른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것을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렇게 곯아떨어질 수 있었을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이해하려고 한다면 오늘날의 산모들과는 좀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히 쉬면서 그리고 산후조리원에서 최상의 시설에서, 그렇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있지 않고, 어쩌면 피곤한 삶을 살아야만 했었던 어머니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피곤한 나머지, 삶이 지친 나머지, 곯아떨어져서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뭉개 죽이게 되는, 그런 너무나도 힘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아이를 죽이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가 인지하지 못한 채 아이가 바꿔치기당하는 것을 기억하지 느끼지 못한 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가만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 옛날 아주 힘든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는 모르고 우리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의 숨을 막히게 하고,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럽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을 해롭게 하는 그런 어리석은 그런 무지한 부모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바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깨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깨어 있어서, 이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그런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제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정말 우리가 잘못된 방법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아이들에게 독을 가르치고, 또는 숨을 막히게 하는 그런 일들을 하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이 아이들을 살리고 이 아이들이 정말 행복하고 이 아이들이 정말 믿음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아이들을 정말 잘 양육할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있고, 우리에게 맡겨준, 그러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들이 있는데, 하나님, 우리가 과도한 보호를 한다는 게,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망치는 일들을 했었고, 오히려 우리가 아이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숨을 막히게 만들어버렸고, 그래서 어리석은 부모와 같은데, 하나님 정말 깨어 있는 부모, 지혜에 있는 부모가 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이죠. 이 세상에 수많은 그런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지만 성경 위에서 듣게 되는 그런 아이들 양육이나, 또는 여러 가지 진리들은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주시는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거니까요. 그런 것들을 잘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면 정말 가장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행동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혜롭게 잘 대해서 이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들로 잘 기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나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이런 데 보니까요. 강아지들하고 교감을 하려고 하는데, 보호자는 그 강아지와 사귀고 싶어서 밥도 먹이려고 하고, 그리고 그 강아지에게 뭔가를 좀 좋은 것을 해주려고 하는데, 강아지는 그 옛날 사람에게 당했던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그 보호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거예요. 다가오지 않는 거예요. 내가 밥을 주면서 “밥 좀 먹어” 하는데, 안 먹어요. 나중에 썰샘이 소개하는데 뭐라고 설명을 해줍니까? 그렇게 앞에서 정면으로 보고 주면 싸우자는 얘기다. 강아지들은 정면에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싸우자는 얘기로 들리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고 뒤로 이렇게 가서 내밀어야 먹는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원과는 달리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분노하게 만들고, 나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두렵게 만들고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강아지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에게도 나는 이 아이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돌본다고 했지만,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더 상심하고 더 용기를 잃어버리고 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일들을 우리가 무의식 중에 하고 있지는 않은지,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면서, 그래서 정말 지혜로운 부모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이해하지 못하겠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왜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로 삼으려고 했을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사랑스럽고 이쁜 것이지, 남의 아이를 데려다 기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을까? 아이를 제가 잃어버리지 않아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이해해 보려고 한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해 보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반된 주장이 있을 때 바른 판결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요. 놀랍게도 솔로몬은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칼로 그 아이를 잘라서 반절씩 나눠주라고 하는 충격적인 판결인 것이죠. 너무나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황당한 판결에 그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경악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결국 이것은 모성애를 테스트한 것이었죠. 결국 누가 진짜 엄마입니까? 아이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포기할 수 있는 게 엄마의 마음인 것이죠.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한다면 물러설 수 있는 것이 그게 엄마의 마음인가요? 그래서 차라리 이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주라고 대답하는 그 어머니를 보면서, 솔로몬은 그 지혜롭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게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결국 이 아이를 잃을 뻔했다가, 그러나 결국에 아이를 제대로 되찾게 된 이 아이의 엄마는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습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 솔로몬이 얼마나 정말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을까요? 하마터면 아이를 빼앗길 뻔했었는데,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롭게 진짜 아이의 엄마를 찾아준 것입니다.

아이가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두 사람이 서로 주장하면 누가 이 아이의 진짜 엄마일까요? 한 사람은 평상시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평상시 거짓말을 안 하고 정직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두 사람이 와 가지고, 서로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주장하면 누가 진짜 이 아이의 엄마일까요? 누가 아이의 엄마죠? 한 사람은 평상시에 거짓말 많이 하는 사람, 한 사람은 평상시 거짓말을 잘 안 하는 사람. 누가 진짜 엄마일까요? 예? 1번? 2번? 2번? 그게 아니고요. 진짜 엄마가 진짜 엄마예요. 평상시에 거짓말 많이 했어도 진짜 엄마가 진짜 엄마예요. 평상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진짜 엄마가 아니라면 진짜 엄마가 아닌 거예요. 여기 한 사람은 호남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영남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엄마입니까? 호남 사람입니까? 영남 사람입니까? 상관없어요. 진짜 엄마가 진짜 엄마고 가짜 엄마가 가짜의 엄마일 뿐이에요. 여기 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이 한 사람은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고 무식한 사람이에요. 누가 진짜 엄마예요? 상관없어요. 진짜 엄마가 진짜 엄마고, 가짜 엄마는 가짜 엄마일 뿐이야. 제가 대학에 다니면서 그런대로 점수를 잘 받았습니다. 제가 잘 받은 이유 중에 하나가 뭔 줄 아십니까? 교수님이 제게 이름이 적혀 있으면 보지도 않고 a를 주는 거예요. “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무조건 a 주는 거예요. 다 그런 건 아니고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합니까?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거죠. 어쩌면 우리 부모님들이 판단할 때에도 늘 잘못 판단합니다. 이 아이는 늘 깨뜨려 먹고, 이 아이는 늘 말썽을 피우고, 그러니까 집안에 뭐가 문제가 생기면 이 아들 잘못이에요? 이 아들 잘못이에요? 이 딸 잘못이에요? 이 딸 잘못이에요? “평상시에 많이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잘못한 거겠죠?”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할 때, 다수의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평가하게 될 때, 거기에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솔로몬 앞에 갔던 이 두 사람은 누구였는가? 창기였다고 하는 거예요. 비난받을 수밖에 없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저 사람들의 말을 누가 믿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솔로몬과 같은 재판관이 있어서, 그 당시에는 왕이 재판관의 역할을 했는데, 그런 왕이 있어서 하마터면 빼앗길 뻔했던, 그 아이를 찾아준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고 너무나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늘 편파적인 판정, 재판, 그리고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에 따른 비난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늘 불평만 하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늘 괜찮은 사람이야. 그래서 자신이 행한 행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잘못된 판단으로,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 내에서 그리고 이 사회 내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라면 하나 훔친 사람에게는 몇 년씩 징역형을 때리지만, 수십억 원을 훔친 그런 사람에게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무죄를 선언하거나, 집행유예로 끝내버리는, 초범이라고 집행유예를 선언해 버리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사회 가운데서 너무나도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하는 그 모든 일들에 정당한 평가를 당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고, 저건 실패한 엄마, 저건 실패한 사람, 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 정말 억울한 판결을 받으면서, 우리가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의 출신으로, 우리가 가진 재산으로 우리의 그런 겉모습으로, 키로, 학업으로 사람들을 다 미리 지레짐작해 버리고, 그 사람을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 속에 있는 간절한 갈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에도 좀 솔로몬과 같은 재판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들의 갈망이에요. 좀 솔로몬이 나타나서 이 문제도 좀 해결해 주고, 솔로몬이 나타나서 내 억울한 사정도 들어주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해 주는, 어디 솔로몬과 같은 그런 왕이 우리들에게 없는가? 그것이 우리들의 간절한 갈망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의 재판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시편 7편 1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장이 되어 주셔서, 공의에 따라 판결하시고, 선입견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진 재산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회적 신분에 따라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바로 판단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재판장, 솔로몬을 능가하는 정말 진정한 재판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옛날 창기들이 솔로몬 왕에 나갔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판결해 주시는 그런 은혜로운 판결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솔로몬을 능가하시는 재판관인데요. 안타깝게도 이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좋은 왕이었을까? 좋은 왕이 안 됐어요. 재판은 근사하게 했어요. 그래서 솔로몬의 명성은 아주 아주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 솔로몬에 대해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길 원했고, 솔로몬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길 원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열왕기 상의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솔로몬이 잘못한 모습들이 하나씩 둘씩 나오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 솔로몬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잘못된 판결을 할 때가 있고,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결정들을 하는 어리석은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의로우신 재판장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재판장이신 것이죠. 한 번은 예수님 앞에 어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끌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돌을 하나씩 들고서 예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가 잡힌 이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선생님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돌을 내던져서 칠까요?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판결을 내려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동안 나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진리의 빛이 그들의 심령 가운데 비치게 되자, 마치 방 안에 있는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방인 것처럼 보였지만, 한 줄기 햇볕이 그 방 안에 쏟아지게 되면, 그 안에 먼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눈에 보이듯이,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추어 주시자, 그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있는 죄악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그들은 돌을 들어서 그 여인을 칠 수가 없었고, 그냥 그 돌을 내려놓은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요한복음 8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판결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사람들은 죽여야 될 이유를 찾았지만, 예수님을 살려야 될 이유를 찾은 것이죠.


그리고 그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재판장이신가? 무정하게 아주 잔인하게 재판해 버리고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죄인들을 향해서 그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대신 십자가에 매어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며, 우리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놀라운 은혜로우신 사랑이 많으신 재판장인 줄로 믿습니다.

1933년 뉴욕의 99대 뉴욕시장을 지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아마 여러 번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가 뉴욕시장이 되기 전 판사가 되어서 판사로서 재판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그 시절 그러니까 1900, 아주 옛날 3.1 운동하던 그 시대니까요. 아주 먼 옛날이었습니다. 애니 돌로레스라고 하는 여인이 재판정 앞에 잡혀와서 서게 됐습니다. 판사가 물었습니다. 왜? 빵을 빵을 훔쳤습니까? 빵을 훔쳤습니다. 왜 빵을 훔쳤습니까? 4일 동안 굶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손주들도 다 4일 동안 굶었습니다. 그런데 빵가게 앞을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땅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거라고 하는 걸 알고 있습니까? 예 잘못한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라과디아 판사는 당신이 배고팠던 것은 개인적인 사정일 뿐이고, 법에 따라 판결을 한다고 하면서 10달러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10달러야 지금이야 얼마 안 되지만, 지금으로부터 한 100년 전 정도 되니까, 그 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양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아무것도 없는 그 가난한 여인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지자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여인이 벌금을 낼 돈도 없고 없다고 한다면, 구류를 살게 될 텐데 어떡하나?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판사는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방청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50c의 벌금을 내립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돈을 거두라고 했어요. 자기 자신이 먼저 10달러를 먼저 놓고, 결국 그래서 그 방청석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당하게 된 50c의 벌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쁨으로 냈는데 57달러 50c가 걷혀서, 10달러는 벌금으로 내고, 47달러 50c는 그 여인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는 아주 참 훈훈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를 향해서 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죄를 자신에게로 짊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와 물을 다 쏟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분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엄청나게 억울한 일들이 많아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억울함도 있어요. 우리 친구들로부터 받는 억울한 평가가 있어요. 우리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억울한 평가가 있어요.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그런 아주 부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릴 거예요. 우리를 향해서 매몰차게 대하는 그런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을 때, 그때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창기들이 솔로몬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해결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나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를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 7절에서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사람들은 나를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로운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선을 해나가다가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그 길을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의 길을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일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 심판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계속 악한 일로 계속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마음들을 다 외면해 버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걸어가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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