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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와의 동행 (잠 13:20-23)

오늘 또 잠언 13장의 말씀 가운데서 몇 구절을 함께 살펴보게 됐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을 하게 되면, “지혜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해주고 있는데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것일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된다”라고 말씀해주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혜로운 자가 있으면, 늘 그 사람을 따라다녀야 된다고 하는 말일까요? 내 삶을 포기하고, 그 지혜로운 사람이 가는 곳이면, 늘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그 사람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내 인생은 포기해 버린 채, 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가는 곳을 늘 따라다녀야만 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면, 그다음 행의 말씀을 살펴보면, 지혜로운 자와의 동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다음 행은 첫째 행과 반대되는 개념이 표현되어 있는 것인데요.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고 두 번째 행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365일 24시간 내내, 일주일 내내 그 사람과 함께 다녀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지혜로운 자와 사귀는 것과 미련한 자와 사귀는 것, 미련한 자와 동행하는 것을 서로 대비시켜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자와 동행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과 늘 같이 붙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와 사귀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사회적 존재인 것이고, 그리고 혼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내가 하는 말투, 내가 하는 표현 방식, 내가 하는 그 모든 행동들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빠 엄마가 자녀들을 향해서 특별하게 가르치지 않아도, 나중에 보면 그 아이들이 부모를 꼭 닮아 있어요. 왜냐하면 그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부모의 행동을 보는 겁니다. 부모의 말투를 배우는 겁니다. 부모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영향을 주고 싶지 않으면, 영향을 안 주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공 속에, 무균실 속에 동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 우리가 함께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교제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영향들을 받으면서, 우리는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먹을 가까이하게 되면, 먹물이 묻게 되어 있고, 인주를 가까이하게 되면, 인주에 붉은 그 인주가 우리들에게 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가까이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죠. 누구와 사귀느냐? 누구와 동행하느냐?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런 것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고요. 늘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늘 배려심이 많은 사람과 함께하게 되면, 그 사람들을 닮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와 함께 지내고, 누구를 사귀어야 하는가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의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을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죄인들, 오만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악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게 복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악인들과 죄인들과 미련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과 불평하는 사람들과 원망하는 사람들과 화를 내는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왜 복이 됩니까? 결국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한다고 하면, 그들을 닮게 되어 있고, 그들을 닮아가다가, 결국 같은 길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는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될 텐데, 악한 자들을 우리가 가까이하면서, 그 악한 자들을 닮아가게 된다고 하면, 우리도 똑같이 그러한 그들이 가는 길을 우리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구를 잘 선택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구를 사귈 것인가? 누구와 가까이할 것인가? 누구와 친하게 지낼 것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과 가까이 하라? 지혜로운 자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죠? 우리가 잠언서를 지금 굉장히 오래 많이 했는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죠? 크게 한번 얘기해 주세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아는 사람,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뭔가 정말 기발한 방식을 하는 그러한 재치 있는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잠언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누굽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의로운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가? 누구와 사귀어야 되는가? 악한 길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실하게 순종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 의로운 사람,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 이 저녁 시간에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되는데요. 미련한 자들, 악한 자들과 동행하지 않고, 그들을 사귀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리고, 아예 상종을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있었냐면, 정말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좀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여러 가지 나쁜 사람들, 위선자들, 흠이 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고, 정말 순수한 사람,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정말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열망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정말 많이 분출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욕망들이 생기곤 합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교회 안에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도 있어요. 정말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서부터 멀리 떠난 사람 같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정말 믿음 있는 사람들끼리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열망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노회 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목사일 수 있을까?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장로일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썩어빠진 노예는 탈퇴해 버리고, 이런 썩어 빠진 총회는 탈퇴해 버리고, 아주 순수한 우리들의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열망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열망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정말 많이 반복되어 왔는데요. 그래서 성도들은 어떻게 했는가? 수도원을 만들어,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다 포기해 버리고, 이 세상에서의 욕심, 그리고 명예 권력 부 이런 것들을 다 내버리고, 가지고 있던 것 모든 것들을 다 팔아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약간의 음식만을 먹으며, 오로지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만 하고, 그리고 약간의 노동을 하면서, 그렇게 순수하게 주님과 교제하면서 침묵의 훈련을 해가면서 그래서 정말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그런 수도원 운동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보면 홈스쿨 운동도 있는데요.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니까, 학교가 너무 타락했습니다. 불신자들이 장악한 학교고, 그리고 그 학교에서는 잘못된 성적인 관점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가르치기도 하고,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이런 세속 학교에 우리 아이들을 보낸다고 하면, 우리 아이들이 그 세속에 그런 교육에 영향을 받아서 타락할 수 있으니, 그런 우리 아이들을 그런 세속적인 학교에 보내기보다는, 어디로 보내는가? 크리스천 학교로 보내기도 하고, 크리스천 학교로 보내는 게 힘들면, 우리 집에서 홈스쿨 하면서, 그저 신앙적으로만 교육을 해서, 정말 순수한 믿음을 만들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많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들이 오늘 잠언서 13장 20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된다. 미련한 자와 사귀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교훈의 말씀에 부합하는 모습일까요?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지만, 다른 차원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 전서 5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에 음행 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니라.” 바울 사도는 권면하기를,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하면서, “음행 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 죄악을 저지른 자들과 사귀지 말라. 미련한 자와 사귀지 말라.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라.”라고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면서 고린도 교회들이 교인들이 오해할까 봐, 첨언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고린도 전서 5장 9절 10절에서 첨언하고 있는데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내가 이렇게 가르친 것은, 그러니까 우상숭배자나 음행하는 자들이나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악한 자들을 절대로 상종하지 말고, 아예 아는 척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들과는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고, 우리들만의 개토를 만들어서, 우리들만의 소굴을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들끼리만 잘 살고, 그런 사람들하고는 전혀 관계를 끊어버리고, 우리끼리만 살라고, 그렇게 교훈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불신자들, 지혜롭지 못한 자들, 미련한 자들, 악한 자들과 완전히 끊어버리고, 그것과, 전혀 그들과 전혀 관계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아버리고, 그리고 골방에 들어가서 나 혼자만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도 더럽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가서 나 혼자 기도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그들과 함께 같이 교제하고 장사도하고, 함께 협력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든 일들을 같이 하면서 함께 살았어요. 예를 들자면 누구를 떠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니엘이죠. 다니엘은 유대 땅에서 살다가 바벨론이라고 하는 그 세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그 바벨론은 어떤 곳인가? 우상숭배하는 곳의 본산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과 다른 왕들을 비롯해서, 그 사람들이 모든 시스템 자체가 우상 숭배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 다니엘은 내가 이런 더러운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으니, 자결을 하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살 수 없으니, 내가 산속으로 들어가서, “그냥 나 혼자 토굴 속에서 살겠다.”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겠는가?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바벨론이라고 하는 궁전에서, 그 나라의 궁전에서 바벨론 왕을 섬기며, 그리고 다른 신하들과 함께 협력을 하면서, 그 나라에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죠.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 끌려서, 저 애굽 땅으로 가서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그리고 애굽의 궁정에서나, 그곳은 다 믿음의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우상숭배자들로 가득 차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받아들인 아내는 바로왕이 준 아내를 받아들여야 했었고요. 그리고 이름도 그런 우상숭배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여야만 했었던 것인데, 그들은 내가 하나님을 진실로 섬겨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 땅에서 살 수 없다. 우리는 산속에 들어가서 살아야겠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략적인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잠언서 13장 20절의 권고처럼, 그리고 시편 1편 1절의 권고처럼, 실제적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하고, 미련한 자 악한 자와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능하면 믿음의 사람을 더 가까이하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더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악한 자들, 미련한 자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완전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죠.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그 산 위에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엘리아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그 장면을 본 베드로는 그곳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간청했습니다. “주님, 여기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사오니, 여기에 제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아를 위하여”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이고, 저 돼먹지 않은 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이곳에서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자. 저 마을로도 가자. 우리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우리는 우리끼리 신앙을 잘 간직하면서,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서, 나만 행복하고 나만 좋으면 좋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에게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고, 그 사명을 위해서는 불신자들에게로 가야 되는 것이죠. 이 현장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잠언서 13장 20절의 말씀은 단순히 “누구와 교제할 것인가? 누구와 교제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과 사귀였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미련한 자들,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난 자들, 악한 자들과 무조건 거리를 두는 것이 최고의 방책만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이 있기 때문인 것이죠.

잠언에서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된다. 미련한 자와는 사귀지 말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들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닮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악한 모습을 따라가지 말고, 그들의 악한 일들에 우리가 동조하면서, 우리도 같이 넘어가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고, 우리의 심지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전략적으로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면, 가능하면 지혜로운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같이 하는 것이,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그게 전략적으로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아직 초보의 믿음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가능하면 불신자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성도들과 어울리는 것이, 지혜로운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전략적으로 실제적으로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그들과 거리를 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의 목적에 동조하지 말고, 닮아가지 말고, 동화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2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우리가 지혜로운 자와 사귀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악한 자와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로운 자와 함께한다고 하면, 그러면 결국 선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지만, 미련한 자 악한 자를 따르며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게 된다고 하면, 결국 재앙을 당할 것이니, 그러니 우리가 악의 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선한 길을 따르라고 하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22절의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역시 우리가 왜 지혜로운 자와 함께 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인과 함께 해야 되고, 그리고 미련한 자와는 거리를 두어야 되는 그 이유를 22절에서도 설명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와 함께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함께한다면, 복된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누림이, 복됨을 누림이 자손들에게까지 계속 연결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미련한 자와 악한 자와 사귄다고 한다면, 그들의 길을 따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얻은 재물이라도 다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지혜로운 자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복된 삶이 선인의 그 산업은 자자손손에게 미친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인의 그 업적은, 의인의 후손은 천대까지 복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3,4대까지 미칠 거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이 있는 것이죠. 출애굽기 20장 5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있는 말씀인데요. 출애굽기 20장 5절 말씀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절은 없습니까? 그다음은 없습니까? 그다음? 오늘 안 알려줬군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몇 대까지?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종종 우리 조상들로부터 저주가 우리들에게 흐르고 있으며, 우리들의 가계에 흐르는 영적인 저주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그런 주장들이 한때 한국교회 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만 그렇게 유행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가 자녀들에게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가계에 흐르는 그런 죄의 저주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그런 주장들이 한때 많이 회자되곤 했었는데요. 성경에는 이런 이유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말씀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스겔 18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20장의 말씀에 의하면, 의인의 복은 천대까지 가고, 악인의 그 악은 저주는 3,4대까지 간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에스겔서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면 그 선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아들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면 그 악이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 자녀에게 그 악이, “악의 대가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반대의 이야기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걸까요?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줍니까? 안 줍니까? 헷갈리죠? 성경에도 헷갈리게 써놔서, 헷갈립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부모님의 모든 것들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기 때문인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것으로 인하여 천대까지 미치고, 부모의 것으로 인하여 3,4대까지 미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부모들아, 책임을 가져라.”라고 하는 그런 말이 너의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녀들까지 영향이 미치지 아니하도록, 혹은 영향이, 좋은 영향이 미칠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내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나쁜 일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 부모님 탓이야”라고 조상 탓을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에스겔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됩니까? 지혜로운 자와 동행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해야 됩니까? 미련한 자랑은 사귀지 말아야 하는 그런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 탓을 하거나 할 게 아니라, 우리가 결단하며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가난한 자의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아무리 출발이 가난했어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게 없어도, 우리가 노력하면 되는 것이고요. 아무리 출발이 좋았다고 할지라도, 불의를 저지른다고 한다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결론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 살아야 되는가?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선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데 늘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다시 나아가 엎드려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의 피로 나를 씻겨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결단하고 다시 돌아오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닫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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