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어질수록(삼상 2:18-26)

어둠이 깊어질수록(삼상 2:18-26)

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에봇은 소매가 없는 옷으로 엉덩이 정도까지 내려오는 옷입니다. 이 옷은 오직 레위 지파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cf. 대상 6:22-28) 하나님 앞에서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멸시하였던 것과는 강한 대조를 보입니다. 또한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의 가정은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정과 대조를 보입니다. 엘가나의 집에는 사무엘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아서 가정이 점점 더 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은 한 날에 죽어서 가문이 멸망하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말렸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죄악을 행하였습니다. 성경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고 기록하고 있는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목이 곧아서 전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엘리는 이미 매우 늙은 상태였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cf. 신 6:7; 21:18-21), 엘리는 이미 다 커버린 장성한 자들에게 그의 노년에 꾸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장성해 버렸고, 머리가 커질 대로 커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죄악을 계속 저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2:25). 이런 종류의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 왕이었던 바로의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요구를 바로 왕은 완고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거부하였는데, 그렇게 거부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9:12). 인간의 악행과 죄악들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다는 이러한 표현은 오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결론을 유발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교훈은 죄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으며, 그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 예수님의 죽음은 만세전부터 예정된 것이며, 그 예정된 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일이 꼬여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룟 유다가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지주의 문서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영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런데 왜 성경은 마치 하나님에게 모든 죄의 궁극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오해할만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아무리 악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악한 일이 하나님의 통제권 밖에서 무소불위의 괴력을 가지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통제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악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죄악을 다스리실 것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절에서 17절까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상을 이야기하다가, 18절에서 21절까지는 사무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22절부터 25절까지 홉니와 비느하스의 간음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2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이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생의 죄악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손도 대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죄악의 심장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를 일으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무엘상에 기록된 홉니와 비느하스같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 슬픕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마음대로 제사에 쓸 고기를 가져가 버리듯이, 오늘날 목사라는 사람들이,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음란하고 타락해버린 모습들이 한국 교회의 현 주소입니다. 과연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21).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고 하는 표현은 신약에서 예수님에게 사용한 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죄악에 빠져 영원히 구제불능의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 예수님은 참된 소망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고 정말 절망스러울수록, 우리는 그 악마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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