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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와 훈계 (잠 19:20)

제공해주신 설교 녹취록을 바탕으로, 문맥상 어색한 표현과 오타, 성경 인물 및 지명 등을 정확하게 교정하여 정리해 드립니다. 전문을 그대로 살리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위주로 다듬었습니다.


잠언 19장 20절 설교 교정본

잠언 19장 20절의 말씀 한 절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19장 20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하시는 말씀이 오늘 잠언 19장 20절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권고’가 무엇이죠? 권고라고 하는 것은 조언해 주는 것이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권해주는 충고의 말, 조언의 말, 그런 것들을 가리켜 권고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런 권고의 말을 누군가 해준다고 한다면 그 권고의 말을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까? 그 권고가 주어진다고 해도 무시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시하지 말라. 누군가 나에게 권고한다면 분노하면서 싸우려고 들지 말라.

권고하는 사람을 나의 적으로 생각하고 싸우려고 들지 말고, 나에게 어떤 권고를 해준다고 하면 그 권고를 잘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오늘 잠언 19장 20절 앞부분에 있는 말씀이겠고요. 권고를 들으며 또 ‘훈계’를 받으라고 했는데, 이 훈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훈계나 권고나 그게 그것인가요? 그게 그것 같습니다. 훈계가 권고고, 권고가 훈계고 다 같은 말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들여다보면 ‘훈계’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징계’라고 하는 말입니다. 징계, 즉 징계하고 처벌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잠언 19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번역한다고 하면 “너는 권고를 들으며 징계를 받아들여라. 징계할 때 그 징계를 잘 받아들여라”라고 하는 것이 잠언 19장 20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징계라고 번역하지 않고 훈계라고 번역한 우리 한국말 성경이 조금 아쉽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 성경 말고 다른 새로운 번역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다른 성경 번역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번역했을까 하고 살펴봤더니, 다 훈계로만 번역해 놓고 현대어 성경에서는 ‘꾸지람’, 쉬운말 성경에서는 ‘책망’으로 번역해 놓아서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새로운 번역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그냥 훈계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앞에 이미 번역된 그 번역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에요. 먼저 한번 번역을 해놓으면 그 번역의 영향이 있어서 나중에 번역하는 사람도 그 첫 번째 나왔던 번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 그냥 훈계로 번역해 버린 것인데요. 아무튼 우리 이 잠언 19장 20절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너희는 권고를 들어야 하며 누군가 너를 징계한다고 한다면, 너를 책망하고 징계하면 그 징계를 달게 받으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처벌을 받겠죠. 우리가 잘못을 하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징계를 내리게 될 때 우리는 그 징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에게 징계를 내리는 그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 왜 나한테만 이렇게 하느냐” 하면서 그것을 거절할 것이 아니라, 나를 징계할 때 그 징계를 달게 받아들여서 내 자신의 삶을 바꾸고 생활 패턴을 바꾸는 그런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 19장 20절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그러면 네가 필경은 어떻게 되리라? “지혜롭게 되리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권고를 들을 때, 징계를 내리면 그 징계를 잘 받아들여서 내 생활을 바꾸고 내 생각을 바꾸고 모든 것을 바꾸어 나가게 되면 결국은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고, 결국은 내가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의 말씀이고요.

만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저주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떠올라요.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그 모든 권고가 정말 우리들에게 다 유익한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누군가 너에게 권고한다고 한다면 그 권고를 들으라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권고라고 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인가요? 좋지 않은 권고도 있는 것일까요? 충고, 조언, 권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권고가 우리에게 다 유익한 것일까요? 유익하지 않은 것들도 있겠습니까? 그렇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좋은 의도로 충고하기도 하고 조언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해로운 조언, 해로운 권고도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에게 조언했던 사람들의 조언은 그것은 좋은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조언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망하게 만드는 그런 조언들을 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암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모하고 있는 상황에 있을 때 요나답이라고 하는 사람이 암논에게 조언을 합니다.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 다말을 이렇게 하라”라고 조언을 해주는데 그 조언이 좋은 조언이었나요? 나쁜 조언이었단 말이에요. 암논으로 하여금 멸망으로 가게 만들고 파멸로 이끌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조언을 요나답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준 것이죠.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조언도 잘못된 조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합 왕은 선지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전쟁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이 전쟁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랬을 때 거짓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가서 전쟁을 하십시오. 싸워서 승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조언을 듣고 그 전쟁에 나갔다가 결국 아합 왕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열왕기상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예들을 찾아본다고 한다면 조언이 다 좋은 조언들이 아니라, 잘못된 조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겠습니다. 제일 먼저 조언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사탄의 조언이죠. 뱀의 조언입니다. “네가 그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사탄의 조언을 듣고 인류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우리에게 들려지는 조언들이 다 유익하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 19장 20절 말씀에서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고 했는데 이거 어찌 된 일이죠? 훈계와 권고를 들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그 권고가 선한 권고, 정말 지혜로운 권고, 바람직한 권고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항상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리게 될 텐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여러 가지 조언들을 해주고 여러 가지 권고들을 해줄 텐데, 그러한 권고들을 무조건 무작정 들을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하는 것이고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우리가 분별해 나갈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권고를 들을 때 그 권고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가 분별해야 하는 거예요.

분별해 보아서 그 권고가 정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부합하는 권고라고 한다면 그 권고를 우리가 들어야 되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주어지고 있는 수많은 잘못된 권고들, 악한 권고들에 우리가 따라갔다가는 결국 망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잠언 19장 20절에서 해주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라, 징계를 받아들여라”라고 하는 이 말씀의 전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권고가 선한 권고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선한 권고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들어야 합니다. 그 선한 권고의 말씀을 따라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권고의 말씀을 우리가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요 필경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신다는 그것을 기억하며, 그 권고의 말씀 가운데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권고가 주어지고 있는데요. 권고는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 성경의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권고해 주는 경우가 있겠고요. 또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권고해 주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동료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고해 주시는 말씀들이 있을 겁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믿음 생활 잘해야 되지 않겠느냐” 서로가 서로를 권면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들리게 될 것이고, 믿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우리 동료들을 통해서,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고가 주어지게 될 때 우리가 그 권고를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권고가 만일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도 나에게 권고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요? 첫 번째는 자신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한 상태가 되게 되면 사람들의 권고가 내 귀에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내가 교만해진 상태에 있으면 그 어떠한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고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전혀 들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런 권고가 들리지 않는 경우는 언제인가? 우리가 악에 빠져 있으면 그 권고의 말씀들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악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눈멀게 하고 귀멀게 하는 것이 악의 특성이거든요. 그래서 악은 어디서 움직이는가, 어디서 자꾸만 많아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귀를 닫아버리고 눈을 닫아버렸을 때 계속해서 악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악은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를 집어넣는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그런 조언들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 3장 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주 희귀했다고 사무엘상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들의 삶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내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우리를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우리의 발걸음을 바꾸는 그런 조언들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주 심각한 영적인 위험 가운데 빠졌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해 줄 것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말씀해 주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든지, 아니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한 기회들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아주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간절하게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 23장 8절에서 9절 말씀에 보면 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지만 이쪽에 가서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가,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시는가 사모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너무나도 답답해하는 그 모습이 욥기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이고요. 엘리야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열왕기상 19장 11절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실까, 저걸 통해서 내게 말씀해 주실까” 바람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해 주시는가 자꾸만 기다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괴로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간절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할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복된 사람인가,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정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혹은 설교를 듣는 가운데 혹은 이웃들을 통해서, 친구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권고가 들릴 수 있는 것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권고를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권고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로는 징계를 받을 때 반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이렇게 우리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자존심이라고 하는 우상 혹은 명예라고 하는 우상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 권고를 해주면 “아, 감사합니다” 하면서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의 우상이 들어 있으면 반발하게 되어 있고 듣지 않으려고 하고 싸우려고 드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존심의 우상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잘못된 우상들이 있기 때문에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믿음의 길은 우리가 어떻게 가는 것인가? 우리가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하고 권고하고 독려하면서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함께 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같이 공동체를 이루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죠.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목표는 무엇인가, 왜 모이는가, 우리가 왜 함께 신앙생활하는가? 그 이유는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 가운데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4장 15절의 말씀이 약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데 이런 뜻이에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주어서, 참된 것을 우리 성도들끼리 서로 말해주고 조언해 주어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게 해야 된다고 하는 말씀이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이에요.

우리 성도들이 같이 신앙생활하면서 서로 권면해 주는 것이죠. 같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만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도록 그렇게 서로서로 권면해 주는 가운데 어떻게 권면해 주는가?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정죄하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사랑의 방법으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잘 되돌아가도록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믿음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서로서로 이야기해 주어서 그리스도의 그 장성한 분량에까지 모두가 다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공동체가 되는 게 교회의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서로 권고해 주고 충고해 주면서 함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해 가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 것이고, 그런 권고를 들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 내가 그랬군요. 내가 잘못했군요. 내가 이런 면을 고쳐야 되겠군요.”

하면서 서로 받아들이면서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잘못하는 거 있으면 잘못을 자꾸 지적하고 그래서 “이거 잘못했으니까 그렇게 고치라”고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우리가 권고할 때 어떻게 권고해야 하는가? 지혜롭게 권고해야 합니다. 어떻게 권고하지 말아야 하는가? 잠언 27장 14절 말씀에 보면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축복한다고 축복했으니까 좋은 것일까요? 아니에요.

때와 방법과 그 모든 것들이 고려되지 않은 채 그냥 좋은 것을 내던지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권고를 해주면서 선한 인도를 통해 영적인 성숙을 만들어가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잘못하는 것 있으면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면서 함부로 지적질하고 함부로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에베소서 4장 15절에 있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해야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고, 그런 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혜롭게 아주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좋게 말을 순화하고 깊이 고민하면서, 이 일로 인해서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아니하도록 정말 이 성도의 마음이 잘 변화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권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줘야 될 책임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치 자녀에게 하듯이요. 우리 아들, 우리 딸에게 이야기할 때 “야 이거 해라, 왜 이거 안 하냐”라고 말하면 되던가요? 안 돼요. “야 공부 좀 하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공부를 하던가요? 아니요, 더 안 해요. “너는 왜 잠만 자냐” 하면 잠을 안 자나요? 아니요, 반발만 해요. 역효과만 가져와요.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한두 번 얘기했다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구나” 하고 벌써 다 지혜롭게 터득하셨잖아요. 우리 아이한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나는 이거 원하는데 혹시 네 생각은 어떠니?”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할 때 얼마나 조심스럽게 얘기하는지 몰라요. 우리 아이가 혹시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우리 딸이 혹시 고통스러워할까 봐 말 한마디 할 때도 함부로 얘기하지 않고 조심조심하면서 이야기하듯이, 우리 성도들 서로 이야기할 때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심조심해가면서 서로 권면해 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 25장 11절 말씀에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의 금사과니라.”

금사과를 어디에 담아줘야 돼요? 아로새긴 은쟁반에 담아주어야 이것이 너무나도 귀한 선물인 줄 알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금사과를 우리가 줄 때 어디다 줘요? 쓰레기통에 담아가지고 탁 던져버린단 말이에요. 그 좋은 금사과를 왜 쓰레기통에 담아 던져주느냐는 말이에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기뻐하지 않아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요. 은쟁반에 잘 담아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잘 변화될 수 있도록 정말 조심해서 권고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는 권고를 하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내가 권고를 받는 입장이라고 하면 어떻게 권고를 받아야 할까요?

누군가 나에게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면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화를 내고 안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마음이 쓰라려도 이것이 나를 위한 좋은 권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잠언 19장 20절 말씀은 어떻게 권고합니까? “너희는 권고를 받아들여라.” 누군가 나를 향해서 날카롭게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날카롭게 이야기해 주는 그 말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있어야 될 것이고 지혜가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강아지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강아지는 그 강아지의 발에 있는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해서, 이 강아지의 문제를 수술하기 위해서 수의사가 다가가 치료하려고 하면 강아지는 어떻게 해요? 으르렁거리고 물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 권고가 나를 살리는구나, 이 권고가 나를 죽음에서부터 깨어나게 만드는구나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권고를 잘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구처럼요? 다윗처럼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가서 “네가 바로 그 사람이라, 네가 바로 그 죄인이라” 했을 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향해서 죽이려고 달려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회개했던 것처럼 그 권고를 받아들이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복된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여 저희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권고를 들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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