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솔로몬 시절에 솔로몬을 괴롭힌 두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다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죠. 이 하다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민족 사람인가 에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돔이 어느 민족이죠? 에돔, 에돔은 바로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유다 민족과는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척뻘 되는 그런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인데 에서의 후손들이니까 아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에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에돔 사람들과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가 아주 껄끄러웠습니다. 별로 친하지가 않은 것이죠. 서로 대적이 되고 서로 다투고 하는 그런 좋지 않은 관계 가운데 지내고 있었던 것이죠.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그리고 친척뻘이 되고 있는데 왜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이죠. 같은 우물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고, 같은 초원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서로 이해 충돌이 생겨서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관계도 그랬었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겠는데요. 아브라함과 롯이 정말 가까운 친척인데 삼촌과 조카 사이의 관계인데, 이방 땅에 와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 서로 얼마나 의지가 되겠습니까? 이방 땅에서 핏줄이니까 얼마나 서로 도움이 되겠습니까? 서로 의지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서 잘 보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무슨 갈등이 생겼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서로 다투는 겁니다. 서로 양들을 먹여야 되는데 누가 우물물을 먼저 먹일 것이냐를 가지고 두 목자들 사이에 서로 싸우는 겁니다.
누가 푸른 초장에 가서 누가 먼저 먹일 거냐 하는 것 가지고 서로 다투게 되어 버려서 결국 결말이 어떻게 끝났습니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서로 헤어지는 결정을 하고야 만 것이죠.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나라 주변에 있는 나라들하고 우리나라하고 관계가 좋은가요? 미운가요? 안 좋죠. 일본과 아주 가까운 나라인데 일본하고 왠지 모를 그런 감정이 쌓여 있는 겁니다. 중국과의 왠지 모를 그런 감정들이 쌓여 있는 겁니다. 중국과는 서해안 꽃게를 놓고 서로 다투는 거예요. 일본과는 또 뭔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겁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툴 수밖에 없는 것이죠. 멀리 있으면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서로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무슨 같이 싸워야 될 그런 이슈들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문제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가까이 붙어 있을 때 싸우는 거예요. 남편과 아내가 종종 싸웁니까? 안 싸웁니까? 싸워요. 왜 싸워요?
미워하니까 미워하는 게 아니라 제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제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서로 마음이 상해요. 왜 상해요? 미워하니까 상하는 거예요? 아니요. 가까이 붙어 있으니까 마음이 상하는 거예요. 서로 가까이 붙어 있으면 붙어 있을수록 서로 마음이 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일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것일까요? 관계를 끊어버려야 되겠다가 아니라 가족이니까 그렇구나, 참고 인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서로 옆 사람에게 권면합시다. 참고 인내합시다.
가족이니까 그런 거예요. 합시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 껄끄러움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껄끄러운 불편함,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 불편함, 그 껄끄러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상수가 있고 중수가 있고 하수가 있습니다. 하수의 방법, 중수의 방법, 상수의 방법이 있는데 하수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계를 끊어버리는 거죠. 관계가 불편하니까, 서로 같이 있으면 껄끄러우니까, 불편하니까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나쁜 방법, 가장 좋지 않은 방법—하수—가 있다고 한다면 떠나버리는 것이죠. 헤어져 버리는 겁니다. 관계를 끊어버리는 거죠. 관계를 끊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어요. 떠나버리면 불편할 일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기는 한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떠나버리면 무엇까지 없어지나요?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너무나도 많은 유익까지 함께 사라져 버리는 거죠.
우리는 불편함이 있을 때마다, 껄끄러움이 있을 때마다 아, 너무나도 힘들어서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떠나버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예요. 얼마나 많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보다 몇십 배로 많아요. 장점과 단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장점은 90이고 단점은 10인 거예요. 10%가 껄끄럽고 10%가 좀 마음이 아프고 10%가 나를 힘들게 만드는 부분이에요. 그런데 나머지 90은 무엇인가? 다 장점이에요. 다 유익이에요. 너무나도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90이 좋은데 10이 아프면 어떻게 돼요? 무엇만 느껴져요? 아픈 것만 느껴지죠. 우리의 이빨이 아프면 온몸이 아픈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우리의 아픔이 있으면, 다른 건강한 부분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 아프게 느껴지는 것처럼 사실은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불편함이 몇이다? 10이다. 그런데 그 불편함 10이 아닌 나머지 90은 무엇이다? 장점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잠언서 14장 4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가 더럽히니까 없애버리면 속 시원하죠. 소 없애버리면 좋죠. 아니요. 소가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얼마나 많아, 얼마나 많아. 그래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해서 늘 속삭이기를 “네가 불편하잖아, 네가 힘들잖아, 네가 괴롭잖아, 아프잖아. 그러니까 관계 끊어버려, 떠나버려, 없애버려” 그런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자꾸만 우리 귀에 들려주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관계를 끊으면 이제는 불편하지 않겠다, 이제는 마음이 아프지 않겠다.
이제는 내가 편하게 살겠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자꾸만 우리들에게 주는데,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 불편함 10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90이라고 하는 유익이 한꺼번에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소가 더럽다고 하는 이유로 소를 없애는 어리석음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종교가 하수의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닌 잘못된 종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출가하라고 부추깁니다. 이 속세에서 힘들게 살지 말고, 이 속세에서 고통받으며 살지 말고 출가해 버려서 그냥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라. 자연과 벗하며 살아라.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는 곳에 살아라—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 세상에서 살지 말고 너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처녀로서 혼자 살고, 그냥 총각으로 혼자 살고, 그렇게 정결을 지키며 혼자 사는 것이 가장 거룩한 것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이죠. 가장 나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인 양 속이는 그런 종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런 불편함이 있을 때 끊어버리라가 아니라, 함께 사랑하고 돌보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수의 이야기를 했는데, 중수의 방법—그것은 힘으로 제압하는 것입니다.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대적들,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힘으로 제압해 버렸기 때문에 그 껄끄러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했는데요. 다윗은 요압이라고 하는 군 사령관을 통해서 에돔을 진멸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죠. 소바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다윗은 너무나도 강한 왕이었기 때문에 그 힘에 근거해서 주변에 있는 민족들을 다 제압해 버렸습니다. 힘으로 죽인 것이죠. 에돔 사람들을 다 죽였어요. 6개월 동안 있으면서 요압이 6개월 동안 에돔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그런 일들을 해서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 우리를 힘들게 하지 말라” 완전히 제압해 버렸습니다. 소바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제압해 버렸는데, 그러니까 힘으로 제압하니까 편안해요? 편안하지 않아요? 편안해요. 태평성대를 이루었어요. 그래서 다윗 시대에는 정말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래서 다윗이 가장 훌륭한 왕이었을까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완벽한 힘으로 제어하는 것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우리가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에돔 민족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돔 사람들을 6개월 동안 모든 남자들을 다 죽였어요. 다 죽이고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누가 살아남았어요? 어린 꼬마 아이가 하나 살아남은 거예요. 이제는 그 어린 꼬마 아이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니까 “저 조그마한 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나, 무슨 우리에게 위협이 되겠나” 하면서 그 꼬마 아이는 죽이지 못하고 그냥 간과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꼬마 아이가 어디로 갔습니까? 애굽으로 가서 바로 왕의 동서지간이 되어 버렸고, 그리고 거기서 힘을 기르다가 “다윗도 죽고 요압도 죽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격하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방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도 상처를 입게 되어 있는 것이죠.
다윗이 에돔을 물리쳤지만 하다이라고 하는 작은 아이가 살아남아서 결국 솔로몬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죠. 소바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다윗이 소바 사람도 죽였지만, 그러나 소바 사람들 가운데 르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서 왕이 되어 결국 솔로몬을 괴롭히게 된 것이죠. 따라서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들이 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생활 가운데서, 가정의 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가운데서 호전적인 정책이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주변의 나라들을 짓밟아 버리고, 주변의 나라들을 완전히 우리가 제압해 버리고, 우리의 힘을 길러서 그래서 우리가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면 그래야 완전히 정말 대단한 나라가 되면, 그러면 우리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2절의 말씀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을 가지고 휘두르면 이길 것 같아요. 칼을 가지고 휘두르면 아무도 꼼짝 못하고 순순히 굴복할 것만 같아요. 하지만 칼을 쓰면 어떻게 되는가? 그 칼이 상대방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이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죠. 껄끄러운 일이 있을 때, 불편한 일이 있을 때, 상대방을 제압해 버리고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써서 완전히 제압해 버리면 그러면 문제가 끝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힘이 없어서 물러날 수 있고, 잠시 힘이 없어서 그래서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날 때도 우리가 항상 이 성경적인 원칙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늘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그러면 상대편을 제압해 버리고, 그래서 우리가 정당성을 인정받고 우리가 승리하면 모든 것이 다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싸우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거짓 속삭임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5장 15절의 말씀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어떻게 할까?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피차 멸망하는 겁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서로 편을 나누어서 싸우면서 피차 멸망의 길로 가고 있어요.
교인들 다 떨어져 버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은 다 상실해 버리고, 완전히 전통이 있던 교회들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양희은이 부른 김민기의 노래 ‘작은 연못’이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어느 날 그 옛날, 지금은 물이 더러워져서 아무것도 살지 않는 그 작은 연못에 옛날에는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다가 한 마리가 이기고 한 마리가 죽어버렸는데, 그 죽은 붕어 한 마리가 물 위에서 썩어버려서 그 연못을 더럽히게 되어 그 연못에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그런 연못이 되고 말았다네—라고 하는 노래가 있어요. ‘작은 연못’이라고 하는 노래.
노력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추구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그 사람을 품어 주고 안아 주고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상수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나와 똑같아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다고 하는 점을 인정해야만 같이 살 수가 있는—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달라요. 같지 않아요. 그래서 붙여 준 거예요. 우리가 다 달라요. 서로 달라요. 그래서 함께 있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같이, 서로 다른 사람,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그렇게 서로 인정하고 양보할 때, 결국 우리는 손해처럼 보이지만—내가 양보해야 되기 때문에 손해처럼 보이지만—그게 손해가 아니라 가장 선한 길,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는 사실, 서로 상생하고 윈윈하는 길이 가장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이게 힘들어요. 왜 힘듭니까? 손해처럼 보이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저 사람에게 내가 양보해야 되고, 내가 손해 봐야 되고, 그래야 싸우지 않으니까, 그래야 우리가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손해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그 손해처럼 보이는 것을 왜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빼앗길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승리할 수 있지만 누가 살아 계셔요? 하나님이 살아 계셔요.
정의로우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 계셔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우리의 정말 빼앗긴 것을 다시 되찾아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날 그랄 땅으로 가서 사는 가운데 거기서 우물을 팠습니다. 잘 알다시피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고 풀이 필요한데,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을 파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랄 사람들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 우물은 우리 땅에 있는 것이고 우리 거”라고 하면서 우물을 빼앗아 버렸어요. 이삭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건 내가 판 우물이고 내가 얻어낸 물이니까 샘이니까 내 거야” 하면서 서로 싸우고, 그래서 그랄 사람들을 완전히 죽여버리고 그래서 우물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을까요?
놀랍게도 이삭은 그 우물을 그냥 주고 다른 곳으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우물을 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우물이 또 나오게 만드시는—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또 와서 그 우물을 또 빼앗아 가 버리는 거야. “이거 우리 거다. 우리 땅이다.”
이삭은 다시 그 우물을 내어 주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물을 팠어. 우물을 팠어. 사실 땅을 파서 우물을 얻는다고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또 물이 나오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와서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와 함께 조약을 맺자. 우리 서로 싸우지 않기로 약속하자. 우리가 보니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을 알겠다”—라고 이야기. 창세기 26장 28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자는 겁니다. 아무런 힘이 없이 도망가고 빼앗기는 인생인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두려움을 그들에게 주셨고, 결국 이 조약을 맺으면서 서로 공생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는 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증거해 줄 수 있습니까?
양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이웃들에게 삶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이—우리가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실하게 믿으니까 저러는구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결코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렇게 싸우고 있구나,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구나”—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전혀 믿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 대적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시고 신뢰하게 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그 놀라운 증거들을 전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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