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나단이라고 하는 사울의 아들이 자신을 도와주는 소년과 함께 블레셋 진영으로 홀로 단신으로 들어가서 블레셋 진영을 무찌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 그런 영화 있잖아요. 마동석 나오는 영화 그런 걸 보면 혼자 조폭들 사이에 들어가 가지고 그 수많은 조폭들을 혼자 무찌르는 그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통쾌한데 “아, 이거 비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하기 쉬운 그런 건데 그런 이야기가 그 옛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를 오늘 사무엘상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마동석처럼 막 엄청난 그런 근육질의 남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었고, 혼자서 만일 그 적진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일까요? 혼자 들어가면 개죽음 당하고 오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그 옛날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과 김윤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서로 맞붙었을 때 신라를 대표해서 화랑 관창이 나가서 막 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요나단도 블레셋 진영으로 혼자 그렇게 들어갔다고 한다면 죽임을 당하고 처참하게 비참하게 그 인생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마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시나리오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놀랍게도 오늘 사무엘상 14장의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요나단이 그 블레셋 진영에 들어가서 블레셋 진영의 군사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이죠.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14장 14절에서 1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가는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스무 명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요나단이 들어가서 블레셋 군사들과 싸웠는데 20명 정도를 물리치게 된 것이죠. 물리치게 되는 그 순간에 블레셋 진영에서 큰 두려움이 있었고 떨림이 있었고 그래서 공포 가운데 블레셋 진영이 완전히 몰살하게 되는… 우리가 계속해서 읽어보게 된다고 한다면 나중에 이스라엘 군대가 같이 협력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볼 수가 있겠는데, 아무튼 그 승리의 단초가 된 사람이 누구였는가 바로 요나단이라고 하는 한 젊은 청년이 그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요나단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그냥 혼자 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요나단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그 정답이 무엇이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승리하신 것이죠. 승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게 되는 것일까? 우리도 이런 요나단과 승리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거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실 수 있을까? 이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질문일 겁니다. 또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한다면,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를 질문하면서 올라가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전쟁에 담대하게 들어가게 됐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고 대답을 얻고 싶어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와 함께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실까요? 꼭 그런 건 아닐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갈망한다고 해서 “하나님, 하나님 제발 나와 함께해 주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나와 함께해 주셔서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그렇게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구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가? 한다고 하면, 물론 성경에는 구하라 그러면 내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는 경우를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죠.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살펴보았냐면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 전쟁터에 나갈 때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우리와 함께해 주세요.” 하는 그런 마음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또 전쟁터에 가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는 무엇이었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까?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도와주지 않으신 것이… 도대체 무엇이 달랐을까요?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갔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는데,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갔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그 이유, 그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이 전쟁이 우리들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똑같을 겁니다. 요나단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 말씀에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전쟁이, 어떻게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사람이 많아야, 전투력이 강해야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이긴다고 하는 것을 요나단이 믿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이 믿은 것도 뭡니까?
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우리의 힘만으로 안 되겠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고 믿었던 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생각이었어요. 사무엘상 4장 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도 생각한 겁니다. 전쟁을 어떻게 이기는가—우리의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언약궤를 가져오든 뭘 하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장로들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요나단과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나단은 어떻게 생각했냐면, 하나님께 갈망하고 기도하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누구시다?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을 인정한 거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기게 해 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무조건 따라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기도하지만, 나는 갈망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있고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요나단은 인정했던 것이죠. 사무엘상 14장 9절에서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오.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나단의 말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한번 하나님을 의지해서 블레셋과 전쟁을 하러 갈 텐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까, 도와주지 않으실까—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한번 확인해 보자는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다려, 우리가 갈게”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는 것이니까 가지 말자. 그냥 여기 있자. 하지만 “올라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이라고 믿고 우리가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올라가자—라고 했다고 하는 게 이게 요나단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죠. 이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뭡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면서 언약궤를 가져다 놨어요.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셔야 되는 겁니다. 우리 말을 들어야 돼요. 우리가 원하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줘요.” 하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쓰려고 했던 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이죠. 이게 비슷해 보이지만 엄청난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는가—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내 마음대로 쓰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 이리 와서 내가 원하는 거 해줘요. 하나님의 힘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나를 위해서 일해 달라.”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입니까? 종입니까? 종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에, 내가 바라는 것에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듣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된다고 하는 것—그게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하나님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삼는 그런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요나단은 어떻게 생각을 했습니까? 이 전쟁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나를 승리하게 해 주시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올라가지 말자.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고 한다면 올라가자.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면 승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 아니하면 그냥 우리가 승리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믿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누구를 닮기 쉬운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을 닮기가 쉬운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했어요. “하나님, 그러니까 당연히 내게 복 주셔야 돼요. 하나님, 그러니까 당연히 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해줘야 돼요.” 하나님이 당연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그게 우리들이 흔히 갖기 쉬운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보여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가인이었어요. 가인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겁니다. 하지만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연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때 가인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하는 거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내 말을 안 들은 거예요. 내가 주면 받고, 내가 안 주면 안 받고—내 뜻대로 움직여줘야 되는데, 하나님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가인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가?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태도인가? 마치 우리가 식당에 가는 것과 비슷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는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사 먹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낸 돈만큼 거기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내와야 하고,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를 내와야 하고, 만일 그렇게 안 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들죠?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갑질하는 사람도 생기는 거—“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이만큼 해주지 않느냐”고 화가 나는 것인데,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렸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도 했어요. 기도도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연히 나에게 축복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하나님, 좋은 대학 가게 만들어줘야지 왜 떨어뜨려요? 내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는데 왜 해결해 주지 않아요? 하나님, 내가 병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왜 치료해 주지 않는 거예요?” 하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만이 생길 수가 있는데, 사실은 이것이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종처럼 부려먹고 싶은 우리들의 잘못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욥은 참된 믿음을 가졌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렸을 때, 욥은 그 순간에 불평을 터뜨리면서 “아니, 내가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고, 하나님을 지금까지 섬겨왔는데 왜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한 것이 아니라 욥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욥기 1장 20절, 2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로다.’” 그게 참된 믿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지는 그 순간에 느부갓네살 왕이 경고합니다. “너희들을 이 풀무불 가운데 집어넣겠다. 나를 예배하지 않는다면,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집어넣겠다”고 했을 때 세 친구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다니엘서 3장 17절, 18절 말씀에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세 친구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있어서 구해주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지켰으니까 당연히 건져줘야 돼. 하나님이 우리들의 말을 들어줘야 돼”가 아니라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셔도 감사, 구해주지 않으셔도 감사—어떤 상황에 있든지 감사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믿음이었던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어요.
블레셋과의 전투를 하면서 “하나님, 내가 무조건 가서 싸울 테니까 무조건 이기게 해 주세요” 하면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까 도와주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블레셋 민족에게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서 한 가지 생각을 한 거예요. “만일 그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얘기하는가를 잘 들어보자. ‘가만히 있어, 우리가 갈게. 기다려’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가지 말자. 하지만 ‘올라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걸로 생각하고 그러면 올라가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우리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정답은 예스 앤 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까, 이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실까를 질문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지 않고 기뻐하시지 않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되는데요. 우리들의 삶에서도 늘 이런 판단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요나단이 전쟁과 같은 그런 큰 일을 앞에 두고서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작은 일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 우리와 함께하시는 일일까를 늘 질문을 던져야 되는데요. 바울 사도는 그것을 어떻게 결정했냐면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꾸만 이런 일도 막히게 만들고 저런 일도 막히게 만들고 하는 것들을 보면서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구나”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사도행전 16장 6절, 7절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는 거죠.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성경에 나오는 이 ‘아시아’라고 하는 말은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일을 진행해 나가는데 자꾸만 계획이 틀어집니다. 막히는 겁니다. 여기서 이걸 해보려고 하는데 자꾸만 막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더 깊으신 뜻을 깨달았는데 사도행전 16장 8절에서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로라.”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발견해 나가야 되는데요.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100% 확실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완전히 맞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한다고 한다면 “저 사람이 내가 결혼해야 될 상대자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까?” 여러 가지 것들을 따져봐야 되겠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지 따져봐야 되겠죠.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론을 아주 쉽게 내리지 말고, 너무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길을 인도해 주시는지 진지하게 또 묻고 또 물어보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랍게도 요나단의 방법은 완벽한 방법이 아니고 어설픈 방법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거죠. 그래서 이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을 거예요.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기록해 놓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너무나도 확실한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라고 기록해 놓고 있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그런데 이런 요나단과 같은 그런 극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인도하심이 있는 겁니다.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모든 것 하나하나—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것들을 만나게 될 텐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늘 감사의 마음으로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구나”라는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11월은 우리가 감사의 달로 생각하고 지키고 있는데,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내가 판단해서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이뤘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요즘 젊은 커플과 함께 결혼 예비 학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가운데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있으면 불러다가 몇 주 동안 같이 성경적인 결혼관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이번 11월에 결혼하는 커플이 있어서 그래서 공부하고 있는데 제가 물어봤어요. “어떻게 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됐냐”라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예, 제가 어떻게 어떻게 만나게 돼서 참 제 마음에 들어 가지고 제가 번호를 땄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근데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게 전적으로 그냥 서로 둘이 좋아서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하심이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전화번호 딴다고 성공하나요?” 아니요. 전화번호 딴다고 해서 성공하는 거 아니고, 그랬다고 한다면 다 결혼했겠죠. 다 첫사랑과 결혼했겠죠. 그게 아니에요.
사람이 이렇게 노력하고 저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런 삶을 오늘 우리들이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이번 11월 한 달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까지 우리에게 왔는가, 어떤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가, 그래서 어떻게 승리케 하고 계시는가를 늘 발견하는 가운데 늘 기쁨과 감사가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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