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라고 하는 게 무엇일까요?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재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판은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재판을 바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그 정의가 이 세상 가운데서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시시비비를 바르게 밝혀서, 모든 것을 제 자리로 옳은 자리로 돌려놓는, 그런 재판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정말 이 재판이 잘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잘 구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만일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재판관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대리해서 한다고 하는 그런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재판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는 것이죠. 어머니의 일을 하는 것이나, 아빠의 일을 하는 것이나, 혹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우리로 하여금 대리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되겠는데, 특히 재판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그러졌던 것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그래서 정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만일 재판관이 되신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정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 재판관이 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재판이 바르게 진행되어서, 시시비비를 잘 가려서, 모든 일을 바로잡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서 그 일을 해야 하겠죠. 성경에 보면 그렇게 재판을 바르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죠?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다가와서 한 아이를 놓고 싸웠습니다. 서로 두 여인이 이 아이는 자기의 아이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 가운데서, 상반된 주장 가운데서 누가 진짜 엄마인가? 그 아이를 가짜 엄마한테 준다고 한다면, 그건 정의가 아닐 겁니다. 이 아이를 진짜 엄마에게 잘 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솔로몬은 지혜롭게 그 일을 잘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이 재판장의 자리에서 잘 수행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런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운 재판관들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지어 우리가 축구 경기를 하더라도, 정말 심판이 제대로 잘 된 판정을 해서, 이 볼이 누구의 볼이냐? 이 볼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이 팀에게 있는가? 저 팀에게 있는가? 누구의 발을 맞고 공이 나갔는가? 이 상황에서 파울인가? 파울이 아닌가? 이것이 골인이 됐는가? 아닌가? 이런 것들을 아주 정확하게 판단해서, 아무도 불편부당하게, 정말 공의로운 그런 심판을 하는 심판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축구 경기는 정말 재미있고 참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의 성적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도, 선생님들이 불편부당하게, 정말 이 아이들의 평가를 제대로 잘해서, 성적을 잘 매겨줄 수 있다고 한다면 정말 좋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재판들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종교 재판이라든가, 아니면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재판들을, 그 가운데서 정말 정의가 실천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구현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현실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현실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판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재판들이 너무나도 많이 나오는 것을 우리가 직접 목격하면서 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겨우 몇백 원 훔친 것은, 어마어마한 형벌을 가하는 반면에, 50억을 도둑질하고 수천억을 도둑질해도, 아무런 죄가 아니라고 판결을 내리는, 그러한 이상한 재판이 벌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을 악인이라고 해서 처형시키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악인을 아무 죄가 없다고 하면서, 무죄 방면하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오늘날 우리 이 사회 가운데서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시대에서부터 이러한 잘못된 재판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잘못된 재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도의 재판인 것이죠.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리는 빌라도의 재판은, 그야말로 잘못된 정의가 사라진 재판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십자가형을 처하게 하면서도, 그러나 정작 범죄자였던 바라바는 방면시켜 주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이 세상의 재판정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또 하나의 잘못된 재판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서, 그 거짓 증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고, 사건들을 조작해서, 아무 죄가 없는 나봇을 돌로 쳐 죽게 만들고, 그리고 그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해 버린, 사악한 아합의 그 나쁜 조작의 사건이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분히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인간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매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조작을 통해서, 재판을 악용하는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너무나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데, 주로 누가 그런 일을 하는가? 대부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그런 악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악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서로가 그 악한 사람들끼리 권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봐주면서, 그렇게 잘못된 재판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권력자들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인 것이고, 그런 모습들이 어디서도 많이 나타나는가?
종교 재판 가운데서도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교회의 역사를 본다고 한다면, 아무 힘도 없고 정말 나약한 여인들을 마녀라고 하면서, 죽인 마녀 재판과 같은 일들이 교회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게 된 것이고,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향해서, 심판을 해버리고, 재판을 해서 처형을 하고, 잘못된 재판들이 이 종교 재판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법정 속에서, 그래서 억울한 판결을 받는 일들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그 잘못된 재판에 대해서 대응할 방법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참 안타까운 모습을 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 18장 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어떻다고요? “선하지 아니하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악인은 괜찮다고 두둔하고, 악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증거가 없다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다 풀어주면서, 의인에 대해서는 억울한 판결을 해버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그런 행위가 선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악한 일이라고 규정해 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누가 새겨 들어야 할까요? 재판장들이 새겨 들어야 되겠죠. 여기 재판장들 계시면, 꼭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제 설교를 듣는 판사가 계시다고 한다면, 꼭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또 재판정에 서 있는 증인들도, 내가 증인 증언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바른 증언을 하고, 사실에 맞는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재판이 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증인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악한 자를 두둔하는 거짓된 증언을 하거나, 아니면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거짓된 증언을 하는, 그런 악한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서, 이 세상 재판정 가운데서도,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우리가 재판을 한다면, 재판을 하는 자나, 혹은 증언을 한다면, 증언을 하는 자나, 모두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새겨 들어서, 그래서 악인을 두둔하는, 그런 잘못, 혹은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그런 잘못들을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재판의 자리에 들어가거나 증인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내 목숨이 위협을 받는가? 내가 어떤 손해를 보는가? 거기에 따라 증언을 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 나에게 어떤 손해가 있는가? 여기에 따라서 우리의 증언을 잘못할 것이 아니라, 정말 진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의사가 만일 소견서를 발급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떠한 압력에 굴복해서, 잘못된 내용을 거짓으로, 그 소견서를 제출할 게 아니고, 정의에 따라서, 사실에 따라서 바른 소견서를 써줘야 할 것이죠.
우리는 우리가 재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늘 재판과 연관된 자리에 있을 수가 있겠고, 우리는 증언을 하게 될 수도 있겠고, 여러 가지 자리에 있게 될 텐데,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사람들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 가족들을 위협하고, 혹은 나에게 어떤 손해가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의해서, 정의를 굽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정의가 이 땅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대부분 재판관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재판과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도 다 재판의 자리에 많이 서게 됩니다. 어떤 때 재판을 많이 하게 되죠? 우리도 판단의 자리에 들어갈 때가 많이 있는 것이고요. 사실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판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들끼리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도 우리는 선수들을 판단합니다. 뭐라고 판단하죠? 축구를 보면서, 아니, 저 밥만 먹고 축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을 저 하늘로 뻥뻥 차느냐고 하면서, 그 사람들의 실력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죠. 일종의 재판이나 마찬가지예요. 선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들도, 어떻게 보면 재판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우리들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또 우리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개는 안 돼.” “아무개는 돼.” 하면서, 어 여러 가지 카톡을 통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정보에 의해서,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일들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재판관의 자리에, 이런 정식 재판의 자리에 있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러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어떤 판단이나 평가, 그런 것들을 늘 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삶 자체가 일종의 재판의 자리에 우리가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시면서 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재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늘 사람들을 평가하는 겁니다. 심지어 설교를 들을 때도 판단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 오늘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나, 못하나, 한번 판단해 보자.” 그러시는 분들도 있는데, 아무튼 우리가 늘 판단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악인을 두둔하거나,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잘못된 판단, 말들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 함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는 일들에 앞장설 때가 많아요. 특별히 우리가 어떠한 것이 우상이 되면, 우리의 눈이 가려지고, 귀가 가려져서, 맹목적인 추종을 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비난을 하거나, 무조건 칭송을 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크게 문제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가 너무 정치적으로 함몰되어 있는 것이 그게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서로가 어떤 진영 논리에 빠져서, 그래서 상대편의 말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사실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짜 뉴스인지 가짜 뉴스인지, 따지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내 생각과 맞는 것 같다고 하면, 막 퍼 나르면서, 그러면서 이런 정치적으로 함몰되어 있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 성도님들은 신중하셔야 됩니다. 왜? 오늘 성경 말씀이,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재판은 잘못된 것이고, 또한 악인을 두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렇게 선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정식 재판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카톡을 전달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좋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무조건 욕해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행동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좋다”라고 선전한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행동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카톡 하나를 퍼 나른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동을 담고 있는가? 세심하게 살펴보아서, 우리가 함부로 이 것들을 전달하는, 그런 전달자와 같은, 통로와 같은 역할들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특히 어떤 존재들인가?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거죠. 진실은 상관이 없어요. 진실이 무엇인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나에게 내 마음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상관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 동의하고, 무조건 다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요. 그런데 정말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과연 이게 진실일까?”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렇게 거짓 포장 등, 그런 가짜 뉴스들을 우리가 막 전한다고 한다면 성도로서의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신중해야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거나, 악인을 두둔하는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 선하지 못하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신중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막 자꾸 나르지 마세요. 우리 성경 단톡방에도 나르고 있습니까? 그러시진 않죠. 감사합니다.
여기 우리 그룹에 몇몇 사람이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은 행동하는 게 이상하고, 말하는 게 좀 거슬리고, 나와는 모든 것이 다 다른 것 같은, 그래서 보기만 해도 별로 마음에 안 들고, 보기만 해도 별로 참 정이 안 가는, 그런, 그런 사람이 우리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그룹 중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구겠습니까? 아까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많습니까? 없습니까? 어느 정도입니까? 모르는 거예요 누가 범인이에요? 범인이 범인이에요. 범인이 범인.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내 어떻게 생각하죠? 저 사람이 했을 거야. 내가 평상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사람, 말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고, 행동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고, 뭔가 나랑 모든 것이 안 맞는 것 같은, 바로 그 사람을 의심하면서, 저 사람이 훔쳐가지 않았을까?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닐까?”라고 우리는 이내 판단을 내려버립니다. 그것은 선한 일일까요? 악한 일일까요? 악한 일이에요!
오늘 잠언서 18장 5절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예단을 가지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떤 사람을 그렇게 선입견으로 판단한다고 하면, 그것은 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집 안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는 얌전하고, 모든 것들이 신중하고, 모든 거 하나하나 하는데, 똑 부러지게 일도 잘하고 하는 아이가 하나 있고, 또 한 아이는 덤벙 덤벙대고, 뭐 하나 좀 제대로 마무리하는 게 없고, 늘 사고도 많이 치고, 늘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아이가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왔더니 뭐가 하나 깨져 있어요. 누가 한 일일까요? 이 아이일까요?
전 대학 때 점수를 잘 받았어요. 왜 잘 받았을까요? 교수님들이 제가 리포트를 내면 제 이름 보고 그냥 A+ 주는 거예요. 읽어보지도 않고 A+. 왜? 얘는 공부 잘할 거야. 얘가 쓴 리포트는 괜찮을 거야. 혹시 한혜실 권사님도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니. 안 했다고! 그러시네요. “얘가 쓴 리포트는 괜찮겠지” 그러면서, 그냥 점수를 막 줘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늘 공부 못하고 뭐가 문제가 많았던 그 학생이 리포트를 내면, 교수님이 보고 읽어보지도 않고 C, D 주는 거예요. 왜? 별 볼 일 없었으니까. 얘가 낸 것은 아무런 읽을 만한 가치가 없을 거다. 미리 판단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선하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오늘 우리가 우리 신중하게, 우리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모든 판단 하나하나에서도, 우리 가정에서든, 우리 교회에서든, 혹은 이 사회에서 그 어떠한 문제를 대하든,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 함부로 예단하면서 평가할 게 아니라, 정말 내가 혹시 의로운 자를 억울하게 하지는 않는지, 악인을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안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어 말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갈릴리에서 선한 게 날 리가 있느냐? 갈릴리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판단 속에서, 선하신 예수님, 의로우신 예수님을 악하다고 판단해 버리고,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버리면서, 그러면서 예수님을 거부해 버린 것이죠. 갈릴리 사람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저 사람의 아빠를 알아. 저 예수의 아빠는 요셉이 아니야? 요셉의 아들이 뭐 별 볼 일이 있겠느냐고! 저 사람의 어머니가 마리아 아니야? 마리아에게서 무슨 별 볼 일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겠느냐고! 그 요셉과 마리아의 집안 가운데서, 어떤 선지자가 날 수가 있겠는가? 저 목수의 아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죠. 그것은 선하지 않은 판단일 뿐만 아니라, 그런 악한 판단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가 되는 판단인 것이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복인데, 선입견과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가 잘못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나에게도 큰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트럼프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어서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키며, 잘못된 판단으로 이민자들을 향한 잘못된 정책을 세우고, 유색 인종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세우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경을 끼고 다니며, 마치 크리스천인 것처럼 하면서, 크리스천들의 표를 얻고는 있지만, 그러나 정작 자기가 하는 일은 오늘 잠언서 18장 5절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일들이, 그리고 악인을 두둔하는 일들을 하면서, 그것이 내가 크리스천의 모습이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잘못된 행위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의 피부 색깔로, 이 사람의 출신지로, 이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로, 이 사람이 공부를 많이 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이런 것들로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제대로, 잘, 사실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존중하고 평가해 주는 것이 그게 신앙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놀랍게도 니고데모는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50절에서 51절의 말씀에 “그중 한 사람, 그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예수님의 말도 들어보지 않고,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는지도 보지도 않고, 그 사람의 출신지로 함부로 판단하느냐 하면서, 촉구했던 이 니고데모의 자세를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사람들이어서,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 우상에 꽂히게 되면, 돈이 우상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가 우상이 되거나, 이데올로기가 우상이 되거나, 내 자존심이 우상이 되거나,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되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우상처럼 앞을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는, 우상을 닮아갈 수밖에 없게 되겠는데, 우리는 늘 그래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잘못된 판단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늘 주님 앞에 기도하러 엎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희들의 이 완악한 죄악을 씻겨주시고, 죄성을 없애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겨주셔서, 우리들의 눈에서 그 비늘이 벗어지게 하시고, 우리들의 귀에서 그 막았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게 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고 정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