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가인과 아벨 (창 4:1-7)

오늘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받지 아니하시고, 이 일로 인해서, 결국 그 가인이 동생 아벨까지 죽이게 되는, 그런 끔찍한 사건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얘기한다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거라고 할 수가 있겠죠. 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이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농사를 지은 다음에, 그 농사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수확을 거두고 난 다음에, 이 모든 것이 내 수고와 내 노력으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기에 이 풍성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겁니다. 양을 치는데, 이 양들이 건강하고 이 양들이 참 잘 번성하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얻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내가 뛰어나서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잘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하는 그 믿음의, 그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과 아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우리가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그 이야기를 기억하기 때문에, 가인이 어떠한 사람인가? 가인이라고 하는 것은,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동생을 죽인 살인마요, 광기로 가득한 사이코패스라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사실 “이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악하고 정말 독한 나쁜 사람이었는가?”라고 한다면,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려 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믿음의 결정을 내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어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까지는 너무나도 좋았고, 하나님 앞에 참 좋은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문제가 어디서 발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이 가인은 화를 내게 된 것이죠. 분노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드러나게 되는가?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아닌가”가 드러나는 상황이 언제냐 하면, 바로 이러할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을 때,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만한 생각을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역시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더 잘 드러나는 상황이 언제냐 하면, 그렇지 못했을 때예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을 때에는 그래도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 문제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이 진짜였는가? 아니면 “진짜가 아니었는가?”라고 하는 것이 그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기 시작한 거예요. 분노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왜?”에 대한 설명은 없고,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팩트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사실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고, 왜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왜 하나님께서 받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측해 보아야 되는데, 그 추측이 정당한 추측이 될 수도 있고, 잘못된 추측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서, “왜 받았을까? 왜 받지 않았을까?”라고 많은 추측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당한 추측이 될 수도 있고, 정당하지 못한 추측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의 말씀이죠. 히브리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는데, 왜 받았는가? 아베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더 나은 제사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아벨이 드린 것은 양이고, 가인이 드린 그 예물은 곡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어떤 예물을 드렸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벨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제사가 어떤 종류의 제사였는가? 어떤 마음으로, 어떠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 아벨은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고 히브리서에서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더 나은 제사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가인의 재산은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가인이 드린 제사는 어떤 제사였는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형식은 갖추었지만,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됩니다. 도대체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잖아요.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하나님 앞에 드려질 만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될 것인가? 기왕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셔야지, 안 받는 예배가 된다고 한다면 그 헛수고잖아요? 안 받는 예배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참 안타까운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돼야 되는데,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이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는데요. 도대체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무엇이었는가? 그 정답은 그 해답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부터 24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겁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라고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

그런데 영과 진리로 드린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성경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말이 너무나도 많아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 도대체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무엇이고,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두 개의 단어로서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헨디아디스(hendiadys)라고 하는 형식의 표현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진실한 영으로”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의미, 영과 진리라고 하는 두 개를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영으로”라고 하는 하나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우리가 좀 더 쉽게 표현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어떻게 나가야 되는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우리가 참된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중요한 게 무엇인가? 장소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에요.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형식의 예배를 드리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그 마음으로 나와 예배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한다면 남녀 관계로 비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귀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데, 그 여자는 누구냐면 재벌집 외동딸이에요. 그 여자가 누구냐면 왕의 딸 공주예요. 그래서 만일 이 남자가 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한다면, 그 여자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재벌의 사위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왕의 부마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그런 것들이 다 따라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여성에게는 질문이 하나 떠오르는 것이죠. 과연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과연 이 남자가 나를 얻음으로써 얻게 되는 그 모든 것들, 그 이익을 이득을 그것을 원하고, 나에게 접근하는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돈을 바라보고 나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것인가? 그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에요?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졌을 때에도,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이죠.

재벌이 아니라, 쫄딱 망해서 그래서 이제 거지가 되었을 때에도,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왕위에서 쫓겨나서, 이제 나라가 바뀌고, 그래서 그 왕이 쫓겨나서 죄수의 신분이 되어버렸을 때, “그때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여전히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대단한 이익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어떠한 것을 원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찾는 예배자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참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고 있는가? 그것을 주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고,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나오는 예배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죄가 가득했던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면서,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울면서 울부짖고 회개하는 그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 이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게 되자 불쾌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습니다. 창세기 4장 5절의 말씀이죠. “가인과 그의 재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랬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자신의 동생 아벨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리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죠. 이렇게 가인이 불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이 가인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요? 창세기 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내가 분하려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지금 화를 내는 게 그건 옳지 않다고 말씀해 주시는데요.


왜 가인이 화를 냅니까? 왜 가인이 안색이 변합니까?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예배자로 나간 게 아니라, 손님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래요. 손님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손님은 그 가게의 주인이 나에게 잘 대우해 주면, 좋은, 기쁜 반응을 보이지만, 그러나 그 주인이 내가 낸 돈만큼 값어치를 해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진상 노릇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어떤 식당에서 백화점에서 갑질을 해대는 그런 손님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손님들이 진상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낸 돈만큼의 가치를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죠. 내가 이만큼의 돈을 지불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1등석을 탔으면 1등석에 맞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데, 1등석 대우가 아니라 이코노미 대우밖에 못 받았기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갑질을 해내는 것이죠.

그런데 이 가인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갔는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나가기는 했지만, 예배자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예배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손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을 드렸다고 한다면, 왕인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왕인 손님에게 하나님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재물을 바쳤으면, 하나님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해 주어야 되고,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해 줘야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종교적인 서비스를, 이 세상의 축복으로, 이 세상의 행복으로 나에게 갚아줘야, 그래야 내가 이만큼 낸 것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 손님의 마인드로, 가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거예요. 가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감사의 마음이 드린 게 아니라고 하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드러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게 예배가 아닌 거예요. 그게 제사가 아닌 거예요. 그 가인은 구매자였을 뿐이고, 소비자였을 뿐인 것이죠. 아벨과 똑같은 형식으로, 그 형식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예배의 형식을 취했지만,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구매자의 모습이었고 소비자의 모습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예배의 형식을 갖추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예배가 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벨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헛된 예배를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나가게 됩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줄 테니,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을 바칠 테니, 하나님 내가 이만큼 하나님 앞에 기도할 테니, 하나님 내가 성경 일독 할 테니까, 내가 봉사도 할 테니까, 물질도 드릴 테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내가 이만큼 주면, 하나님도 나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구매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 안 해주면 손해 보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 보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관광지에 가면, 우리가 산에 올라가는 그 길에 늘어서 있는 가게에서, 주인들이 혹은 호객꾼들이 늘어서서 저희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이거 한번 맛 좀 보세요. 여기 와서 식사하세요. 잘해드릴게요. 오시다가 점심때 식사하시면, 다른 집보다 훨씬 더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우리가 등산객들이 길을 가면, 그 옆에서 자꾸만 호객 행위를 합니다. “우리 식당이 제일 맛있어요. 잘해드릴게요. 오세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가서 식사를 하면, 그래서 돈을 받기 위해서, 그 우리가 주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자꾸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예배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모양새가 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그제서야 겨우 하나님께서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얻고자 해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져버리고, 우리가 주일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양이 빠져버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망가져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에게 그런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하시는, 그러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쉬워서, 우리가 우리에게 이런 예배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밀고 당기는 거죠. 하나님 내가 예배드려줄 테니까, 하나님은 나한테 뭐 줄래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너무나도 고마워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로 예배를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져야 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그리고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품어주신, 그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바라고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런 어떤 식으로의 축복이나 은혜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에,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옳을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도 늘 가인과 아벨처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데 그 옛날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시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 때도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언제인가요?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예배를 받으셨나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었나요? 아마 가인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봤지 아는 것 같은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때가 언제인가요?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듣는 것처럼 느껴질 때, 병에서 좀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는 것 같이 느껴질 때, 하나님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 아이를 위한 그 기도가 전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질 때, 하나님 왜 왜 하나님 응답해 주지 않는 겁니까? 왜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예배하고, 이렇게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응답이 없는 겁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만듭니까?

그런 순간들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거죠.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서, 정말 우리가 행복하고 정말 기쁘고, 그렇게 신앙생활 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 응답을 받기도 하고, 성경에 그렇게 수많은 응답들이 있는데, 왜 나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하나님이 왜 우리의 예배는 안 받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겁니까? 그럴 때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자주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가인과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과 같은 선택이죠.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뛰쳐나가서 아벨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다 가인과 같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분노해 버리는 것이죠. 내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한 게 얼만데, 내가 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드린 게 얼만데, 하나님께서 전혀 받지 내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그리고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폭발하는 경우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인의 반응만이 선택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선택이죠? 욥의 선택입니다. 요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어요. 욥은 하나님 앞에 늘 예배하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거 하나 어느 거 하나 흠이 없도록 완벽한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았어요. 그 신실한 욥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들이 들리는 겁니다. 아이들이 죽어버리고 재산이 다 없어져버리고, 알몸이 되어버리는, 모든 것들을 다 빼앗겨버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받지 않고, 나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청천벽력과 같은 그런 모습을 겪게 된 것이죠.

놀라운 것은 욥의 고백입니다. 욥기 1장 21절에서 22절의 말씀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때로는 취직 시험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또 떨어질 수 있어요. 승진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애썼는데 떨어질 수 있어요. 재정적인 문제가 힘들어질 수도 있고, 또 질병의 문제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아무리 해결할 수 없는 자녀들의 문제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가인과 같은 마음으로 나가는 것은 예배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매자일 뿐이고, 소비자일 뿐이죠.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자의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내게 얼마큼 해주는가를 보자”가 아니라,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정말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서야 하는 것이죠. 왜 우리의 마음은 종종 불편합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앉아 있었지만, 사실은 예배자가 아니라 우리는 구매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이죠. 이사야서 29장 13절의 말씀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니라.” 정말 이 여인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 집안이 쫄딱 망해서 재벌이 아니라, 알거지가 되었을 때, 실망하고 돌아서는 그런 남성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죠.


아벨의 제사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벨의 재산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을 보면, 아벨은 하나님 앞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고백하는 그 믿음의 고백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