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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라 사람들 (삼상 23:1-5)

오래간만에 우리가 사무엘상의 메시지를 살펴보게 됐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한 이야기죠.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해서 승리를 가져온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는데, 이 이야기는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어떤 시기에 있었던 일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왕이었을 때가 아닙니다. 다윗이 도망자로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정말 모든 힘을 다했죠. 그래서 다윗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그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그 사울왕의 칼을 피해서, 사울 왕의 그 체포하려고 하는 그것을 피해서, 도망가는 가운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그들을 구원해 낸 이야기가 오늘 사무엘상 23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내고 있던 그 근처 마을이었던 그일라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온 겁니다. 침공해서 그일라 사람들이 실컷 농사지었던 그 곡식들을 다 탈취해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늘 있었던 일이죠. 고대 세계에서는 이웃 마을로 쳐들어가서, 그들이 실컷 농사지었던 것, 그들이 실컷 수고했던 것들을 빼앗아오고 탈취하는 것이 늘 일상이 되어 있었던 그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소식이 다윗에게 들렸습니다. 우리 민족 중에 한 지방 사람들인 그일라 사람들에게, 블레셋이라고 하는 저 할례 받지 못한 민족이 쳐들어와서,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버렸다고 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가서, 네가 도와줘라.”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러 가라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이죠.


하지만 다윗이 그렇게 전쟁을 하려고 했을 때, 다윗의 참모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다윗을 돕고 있던 신복들, 다윗과 함께 지금 피난길에 올라가 있던 다윗의 참모들이 그 계획에 반대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움직이면, 우리가 잘못 행동을 하게 되면, 사울 왕에게 발각이 돼서 잡혀버리게 될 것이고, 죽임을 당하게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참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리가 처해 있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그일라 사람들을 돕겠다고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가 죽을지 모릅니다. 지금 사울왕을 피하는 것도 너무 힘든데, 블레셋과의 전쟁도 힘들 것이고, 그 과정 가운데서 사울왕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고, 아무튼 어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그일라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어렵다고 현실적인 이유를 얘기한 겁니다.


그때 다윗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우리 코가 석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확실하게 다윗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가라.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해 주셨고,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지체하지 아니하고, 동료들을 이끌고 가서, 블레셋을 쳐서 물리쳤고, 그리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돌려주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 왕인 것이죠. 그래서 그일라 백성이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당해서, 그래서 재산을 빼앗겼다고 한다면, 누가 와서 도와주고 누가 와서 구원해 주는 게 정상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요? 사울 왕이 그렇게 해야죠. 사울 왕이 나와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왕은 코빼기가 안 보입니다. 사울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곳에 다윗이 나타났지 사울왕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도대체 사울 왕은 어디 가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사울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 위험의 순간 가운데, 이 그일라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울은 왜 나타나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기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왕의 관심사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왕이니까, 백성을 보호하고, 왕이니까 백성을 구원하고, 내 목숨을 바쳐서 백성을 살려내는 게, 사울왕의 최대 우선의 과제이겠지만, 사울왕의 최고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였던 거예요. 내 자리를 유지하는 것, 내 왕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다윗을 죽여야 되겠다고 하는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울에게 있어서 적은 누굽니까? 사울에게 있어서 적은 다윗이에요. 다윗이 누군데요? 다윗은 자신의 신하이고, 사울은 자신이 보호해야 될 이스라엘 민족이고, 다윗은 사울이 보호해야 될 그런 사람이 바로 다윗인데, 놀랍게도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럼 블레셋은 누군가? 블레셋은 적이에요. 블레셋은 적인데, 그래서 블레셋을 무찔러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블레셋을 우리가 무찌르자” 이야기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블레셋이 적이 아니라, 사실 사울 왕의 친구나 다름이 없어요. “저 나쁜 블레셋 사람들 저들을 죽여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서, 다윗을 죽여주기를 원하고 있는 거죠. 다윗에게 말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200개를 배워오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다윗을 죽이는데, 블레셋 사람들을 이용하는, 어쩌면 이 사울왕의 친구가 블레셋인 것이죠.

언제나 사악한 정치 지도자들은 적을 이야기합니다. 증오심을 일깨웁니다. 하지만 사실은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사악한 속셈들이 언제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있는 것이죠. 사악한 정치 지도자들인 겁니다. 이 사울왕에게 있어서 적은 블레셋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블레셋과는 어떤 전략적인 동지가 된 셈이고, 사실 사울 왕의 적은 다윗이 되어버린, 자신의 정적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왕의 모습을, 우리가 이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들은 늘 언제나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주소서. 왕을 세워주면, 그 왕은 우리를 보호해 주고, 그 왕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게 살고, 그 왕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제발 우리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우도록 허락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 왕을 세웠으나 그 왕이 실제적으로 보여준 현실은 무엇입니까? 블레셋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국민을, 자기 백성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왕이라고 하는 그런 모순, 블레셋의 공격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아니하면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는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는, 그런 참 못된 정치 지도자를 우리가 사무엘상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우리가 늘 이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들의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우상의 모습인 거죠. 우리들은 많은 것에 우리들의 소망을 겁니다. 때로는 우리 자식에게 소망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소망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의 소망을 걸기도 하고, 우리가 갈망하는 명예를 위해서, 우리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집을 얻으면 행복할 것인가? 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행복할 것인가? 내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인가? 내가 결혼을 잘하면 행복할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것을 갈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를 배신해 버리고 마는 거죠.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건강을 잃어버리고,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따뜻한 가족들 간의 따뜻한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내 삶이 피폐해져 버리고, 인간관계는 끊어져버리는, 그런 돈이 우리를 배신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까 하고 바랐던 모든 것들은 다 우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결국 그러한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때로 우리가 소망을 걸었던 정치 지도자들이나 우리가 소망을 걸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사울 왕처럼 우리를 배신해 버리고,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런 현실들을 우리가 언제나 경험해 본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예상치 못한 한 사람에게서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사울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도망자요. 왕이 아니라 거지 두목과 같은 사람이고, 권력자가 아니라 아무런 권력을 지니지 못한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 그일라 사람들을 위해서 일어나서 그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든 것이죠.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일 아니다 생각하고 지나친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다 하면서,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것과 같은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서게 되었는데요.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묻는 겁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물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가라 블레셋과 전투를 해라.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저 고난을 당하고 있는 내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향해서 건져주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형편과 처지를 보면 도와줄 만한 형편이 안 되거든요. 내가 누굽니까? 왕이 아니에요. 내가 왕이 아닌 내가 왕이라고 한다면 군대를 동원하고 내가 왕이라고 하면 물자를 동원하고 내가 왕이라고 한다면 온 국민을 동원해서 그래서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겠지만 내가 누군가 왕이 아닌 거예요. 내가 누군가 도망자 신세인 거예요. 내가 움직이다 발각되면 사울 왕에게 죽는 거예요. 내가 여차하게 잘못 움직이게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내 코가 석자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어려운 조건 가운데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다윗의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말리는 겁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그리라 사람들을 돕습니까? 우리가 가다가 죽습니다. 사우라에게 우리는 망하게 됩니다. 지금 이 유대 지방에 있는 것도 지금 살아가는 것도 지금 참 힘들게 힘들게 겨우겨우 숨어서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완전히 죽습니다. 지금 살아야 지금 목숨을 건져야 나중에 왕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그건 개죽음입니다.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그 반대 의견은 참으로 일리 있는 반대일 겁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늘 경험하게 되는 반대인 것이죠.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또 한 번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라. 블레셋 사람과 싸워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 가운데 전쟁을 해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게 된 것이죠. 이 일을 통해서 다윗은 이미 왕이었습니다. 왕이 누군가 왕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군대를 통솔하고 좋은 옷을 입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루 살 수 있는 게 왕이 아니라 왕이 누군가 왕은 백성들을 보살피는 게 왕이에요. 백성들을 살리는 게 왕이에요. 왕이 누군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원해 낸 게 왕인 것이죠. 그런데 사울왕은 왕의 권력을 가졌지만 왕이 아니에요. 그건 하지만 다윗은 왕의 옷을 입지 않았지만 거기서 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살리는 역할, 구원하는 역할, 왕이 해야 될 진짜 역할을 다윗이 해내는 그런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배워야 할 영적인 진리, 영적인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 “내 형편이 어떤가”가 아닙니다. 내 코가 석자인가? 다섯 자인가를 던지는 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를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어떠한 인물이었습니까? 성경에 나온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자신을 본 게 아니에요. 내 코가 석자인가 아닌가 그걸 따지지 않았어요. 성경에 나온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질문했고, 그 질문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간 것이죠. 갈렙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이가 85이지만 그러나 나는 늙었으니까 뒷방에 그냥 가서 가만히 쉬어야 되겠다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 10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85세로 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선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그들은 크고 나는 약해도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 할 수 있겠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아낙 자손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들은 자신들이 3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은 숫자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의 말씀을 듣고 위대한 군인들을 물리쳤어요.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대한 장소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서 물리친 것이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5천 명을 먹일 수 없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님 앞에 내놓은 소년이 있었던 것이죠.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는 사람을 그냥 외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한 생명을 살려낸 것입니다.


하지만 비겁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자신의 형편을 핑계로 대는 것이죠.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전화벨이 울려서 안 되고, 추워서 안 되고, 더워서 안 되고 다 안 된다는 거 우리 앞에 있지도 않은 적을 무서워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거죠. 우리 앞에 보이는 철썩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고 그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저 바다로 나가면 정말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다로 향해 나가면 신대륙이 기다리고 있고, 바다를 항해해서 나가면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인데,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면서 해변가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가 해야 될 왕의 사명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꼭 왕이 돼야만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해야 할 그 일들이 그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 그게 바로 왕의 일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고 수많을 사람을 살리는 일들이 되는 것인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분별이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두 번 물은 거죠. 내 생각에 도와줘야 될 것 같은데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 물었고, 참모들이 반대하니까, 또다시 확신을 얻기 위해서 물었고,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자, 내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다가 내가 아무것도 안 되고, 그냥 비참한 신세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큰 일을 도모해야 되는데 작은 일 때문에 내가 망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질문 때문에 망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해 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다는 거죠.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하나님 전쟁하러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아주 확실하게 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전쟁해야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하는 확실한 응답을 받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알려주시죠? 하나님 이거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전쟁할까요? 말까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응답해 주십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까?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그게 우리의 문제예요.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여주셔서, 기드온에게는 양털로 이슬로 그렇게 응답해 주셨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해 주시는가 하는 게, 우리의 고민이에요. 그게 우리의 질문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시나요? 하나님 이 문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기도했더니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서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하나님 이거 문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했더니,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응답을 해주시는 건가요? 하나님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확신의 마음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을 통해서 또는 어떤 사람들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라가다가는 문제가 크게 발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밝히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더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대한 배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교우들께서는 저에게 미역국을 안 주세요. 제가 미역국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미역국 끓이는 날 저한테 미역국이 아닌 다른 국을 주셔서 제가 너무나도 깜짝 놀라요. “아니, 이렇게 저만을 위해서 이렇게 국을 끓여주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이러시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속에서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생각하게 됐는데,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제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목사님은 뭐 좋아하는구나. 뭐 싫어하는구나. 이미 벌써 꽤 같이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으니까, 참 잘 아세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그런데 그와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야 되는 거죠.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분별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랑 제 아내랑 어느 식당에 가면 제 아내가 먼저 들어가면 알아서 주문해 놔요. 말하지 않아도 왜 벌써 30여 년 동안 같이 살면서 제가 뭘 좋아할지 싫어할지 알아서 제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시키는데 다 맛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아가야 되는 점점 매순간순간 알아가야 되는데,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도록 분별하도록 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승리를 확신하며 전쟁터에 나갔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지, 승리를 주시지 아니할지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죠. 다니엘의 새 친구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우상에게 전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고, 그 금신상 앞에 절하라고 하는 그런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내놓고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대답 가운데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겠지만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주시겠지만, 설사 건져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명이 무엇인지 매일매일 분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피해를 당했다고 하는 소식과 같은 일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윗과 같은 사람이 일어나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그일라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서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돈이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그 무엇이 구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소망을 거는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옛날 다윗이 정말 볼품없는 도망자의 신세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 말 구유에 누여 초라한 모습 가운데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자라신 그 주님께서 사실은 우리를 위한 진정한 왕이 되셔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코가 석자다라고 하면서 도망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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