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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눈이 멀다

– 이국진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을 우리는 사랑이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맹목적인 사랑을 하지 않으면, 과연 사랑이 가능할까? 맹목적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하면 흔히 눈이 멀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옆에서 단점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단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더 사랑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준다. 사랑은 믿어준다.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어떤 친구의 조언이나 부모의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남자와 결혼하면 너의 평생에 고생길이 훤하며 얼마가지 않아서 크게 후회할 것이라며 반대하는 부모에게, 딸은 편하게 인생을 살기보다는 그 남자와 고난의 길을 가겠다고 응답하는 것이다. 문제는 막상 결혼하고 나면, 마치 선악과를 먹은 것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연애시절 때에는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이던 것들이 결혼 이후에는 지긋지긋한 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후에도, 눈먼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맹목적 사랑은 필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도 눈먼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눈이 멀어있는 기간이 빨리 끝나지만, 자식 사랑의 경우에는 맹목적이지 않을 때가 없다. 항상 자식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으며, 항상 모든 단점마저도 가능성으로 본다. 에디슨의 어머니가 에디슨에게 보여주었던 신뢰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맹목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뢰는 에디슨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이었으며, 결국 에디슨을 훌륭한 인물로 키워내는 양분이 되었다. 이러한 사랑을 먹고 자녀들은 자란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사랑은 항상 맹목적이어야 한다.

정치인에 대한 사랑도 어쩌면 맹목적이다. 진보적인 정당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보적인 정치인을 무조건 좋아하며, 보수적인 정당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무조건 좋아한다. 민주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린턴을 선호하였다. 공화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동이나 언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시를 선호하였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들을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게 사람들의 성향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코넬리우스 반틸(Van Til)은 이 세상에 전제가 없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나 보다. 1

필자가 몇 년 전 [예수는 있다]란 책을 펴냈을 때에도,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철저하게 양분되었다. 2)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찬사를 보내면서, 기독교에 대한 효과적인 변증이라는 점을 높이 사 주었다. 하지만 종교 다원주의를 포용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더 나아가 아직까지 불신자들이 필자의 책을 읽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나는 나의 책이 불신자들을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신앙의 경계선 상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했다. 예전에 동아일보에서 펴낸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한기총에서 압력을 행사하여 절판시켜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물리적인 방법으로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 대응하는 것보다, 책에 대해서는 책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책만으로는 부족하며, 교회가 썩은 냄새를 풍기지 않고 예수의 냄새를 풍기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내 책을 통해서,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란 책을 읽고 약간의 혼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확실성을 재확인시켜 주려는 목적만큼은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다원주의적 시각을 가진 자들은 내 책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틀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머는 것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 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혹은 자녀들이 그 가능성을 발휘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우리는 장점이 되는 맹목적 사랑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맹목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녀들을 균형적인 시각에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래서 맹목적 사랑은 부족하면 더 있어야할 요소가 되기도 하고, 너무 과하면 좀 줄여야 할 요소가 된다. 맹목적 사랑이 사회의 윤리와 도덕적 기준에 반하여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될 때, 그것은 해악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맹목적 사랑이 적절한 예의와 도덕적 기준의 범주 안에서 작용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장점이 된다. 장점이 되는 맹목적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한 13번째 정의와 관련이 있고, 단점이 되는 맹목적 사랑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11번째 정의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사랑에 눈이 머는 것이 장점이 되지 못하고, 단점이 되는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옳음과 충돌할 때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되, 그 사랑의 표현이 도덕적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권고한다(로마서 12:9). 사랑하는 대상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되, 그 사랑의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나타나선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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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코넬리우스 반틸, [변증학] (기독교문서 선교회, 1998).[]
  2. 이국진, [예수는 있다] (국제제자훈련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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