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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 마태복음 23:37

– 이국진

온정주의

미국에 10여 년 동안 살면서 한국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미국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다면,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대체로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을 감싸고도는 반면, 미국 부모들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아주 단호하다.

식당에 가면 그러한 차이를 쉽게 느낀다. 미국 아이들은 식당에서 뛰어다니거나 돌아다니는 법이 없다. 같은 식당 안에서 식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주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국 아이들은 식당에서 뛰어다니거나, 같은 식당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문제는 부모들이 그런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을 자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할 것 같으면, 오히려 남의 자식 기를 죽인다고 싫어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내 자녀가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이다. 우리와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개구쟁이 여자 아이가 있었다. 하루는 그 아이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는 숨어버리고, 또 문을 두드리고 숨어버리는 행동을 반복하였다. 그 아이는 우리 집 아이들이 문을 열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계속해서 그 행동을 반복했다. 우리 아이는 화가 났다. 그래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문을 확 열어 재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깜짝 놀라서 자기 집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우리 아이는 그 집에 찾아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자기 아이에게 사실을 묻고, 혼을 내고, 우리에게 찾아와 아이로 하여금 사과하도록 하였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열 번째 정의는 온정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식을 감싸고도는 것이나 불의를 행한 사람을 무조건 감싸고도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인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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