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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강좌 5강: 르네상스와 개혁의 갈망

오늘은 종교 중세 교회사에서 “르네상스와 개혁의 갈망”이라고 하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중세 교회에 대해서 쭉 살펴보았는데, 중세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교회가 본질에서부터 좀 멀어져 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좀 멀어져 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많이 받으셨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죠. 교회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 세상에서의 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그런 싸움들, 그런 추잡한 모습들이 중세 교회 가운데 많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면 무엇이 다가오죠? 새벽이 다가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 기독교회가 타락해 버리고 교회의 그 본질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저기에서부터 참된 교회에 대한 갈망들이 분출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런 개혁의 갈망들 정말 바른 교회에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 그런 열망들이 여기저기서부터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게 되었는데요. 이런 개혁적인 갈망들이 생겨난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했을 때, 그런 갈망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게 될 때,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성경에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목소리들, 그런 운동들이 여기저기서부터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 우리가 기회가 된다고 한다면 종교개혁사를 살펴보게 되겠는데,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그 큰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결국 가톨릭에서부터 이제 개혁한 개신교회가 탄생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그러나 이 개혁의 열망이라고 하는 것이 미미한 목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한두 사람이 외치는 거죠. “이건 바른 길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성경에서부터 벗어난 것 같다.”라고 하면서 한두 사람이 외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한두 사람이 외치는 그 외침이 이런 어마어마한 거대 종교 권력의 힘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미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 미미한 목소리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힘이 있는 것이죠. 진리 자체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수가 외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외친다고 할지라도, 진리에 서 있다고 한다면, 정말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돼서, 결국 종교개혁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개혁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그 이전에 어떠한 개혁의 갈망들이 있었는가? 제일 먼저는 교회 회의를 통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그런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황의 그 권세가 세지니까, 교권을 다투기 위해서 서로 싸우는 것이죠. 그리고 그 교황들이 서로 누가 서로 교황이 될 것인가? 세속적인 국가와 결탁한 그런 교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 교황이 한 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 내가 교황이다” “내가 교황이다” 하면서, 서로가 자기가 교황이라고 그렇게 서로 싸우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그런 걸 보면서 이제 우리가 교황에게만 모든 걸 맡겨놓으면 안 되겠다. 우리 종교회의를 통해서, 교회 회의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 한 것이, 교회 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당시에 로마 교황 로마에 있는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2세라고 하는 교황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에 거주하면서 이탈리아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그런 수장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프랑스의 아비뇽에는 또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있어서, 내가 교황이라고 하면서, 서로 두 명의 교황이 나타나서 서로 막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것을 바라보면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야 되겠다 해서, 피사라고 하는 곳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느냐? 그레고리우스 12세도 교황이 아니다. 베네딕트 13세도 교황이 아니다. 서로 아니다고 얘기해 버리고,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 교황을 옹립하면서, 이제 우리가 요한 23세를 교황으로 받들자 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해결이 됐겠죠? 아닙니다. 이번에는 교황이 3명이 생기게 된 겁니다. 결국 교황이 3명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결국 요한 23세가 물러나고, 그래서 서로 이제 합의를 해서, 그러면 로마 교황인 그레그리스 12세도 물러나고, 베네딕토 13세는 죽은 다음에 그 이후에 교황이 이어지지 않게 돼가지고, 결국 교황이 한 명으로 요한 23세는 강제 퇴임시켜 버리고, 콘스탄스 회의에서 그리고 마틴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 회의가 교회를 좀 깨끗하게 해 보자. 교황들이 서로 싸우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회의가 좀 개혁을 해보자 해서 이단을 척결하자. 그리고 당시에 많이 일어나고 있는 성직 매매, 성직 중임제, 목회자가 신부가 하나의 성당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성당을 하는 그런 중임제, 궐석제 이런 것들을 다 금지하는 칙령도 반포하면서, 개혁을 해보려고 했던 게, 콘스탄스 교회 회의를 통해서 이런 개혁들을 시도하려고 많이 했었습니다. 이단 척결하자고 해서 좋은 후스를 이단 척결했는데, 사실 후스라고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그런 회의에서 이단 척결한다고 해서 물리치게 된 것이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런 교회 회의를 통해서 무엇인가 개혁하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은 유명무실한 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직 매매하지 말자 뭐 이런 거 결의를 했지만, 그 결의가 제대로 잘 지켜지느냐 하면 잘 지켜지지 않게 된 것이죠.

그럼 그 개혁의 열망들이 어디로 이어졌는가? 개인 개인을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존 위클리프라고 하는 영국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320년에서부터 1384년까지 있었던 위클리프라고 하는 사람은 영국에서 교편생활을 했는데, 이 위클리프의 생각은 교회가 이렇게 타락한 것은 단순히 우리가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교리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부터 벗어난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면서, 교리 자체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위클리프는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이거 너무 당연한 말이죠.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어야 된다는 것이 당연한 말인데, 중세 시대 때는 이게 당연하지 않았어요. 중세 시대 때는 성경 책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위클리프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가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성경을 번역해서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르쳐줘야 된다 해서, 위클리프의 후계자들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 번역 성경의 선구자가 누구냐? 위클리프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경 번역 선교회가 있는데 위클리프 선교회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성경 번역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튼 성경을 모든 사람한테 읽혀줘야 된다고 주장했고 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우리 종교회의에서 화체설을 천주교회가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이 화채설은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됐다”라고 위클리프가 이야기했습니다. 화체설이 뭐죠? 성찬식을 할 때 빵을 나눠주고 포도주를 나눠주면 그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것이 화채설이고, 이게 천주교에서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나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냥 기념한다. 그냥 성찬식을 할 때 주님께서 영적으로 함께한다. 그렇게만 받아들이지,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죠. 그 이야기를 제일 가장 먼저 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 위클리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위클리프는 왜 그렇게 주장했느냐? 성육신 원리에 맞지 않는다. 화체설이라고 하는 게. 성육신 원리가 뭐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셨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이 없어져버리고, 인간만 된 건가요? 아니죠. 하나님이 그대로 있으면서,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이 성육신의 원리잖아요? 이것처럼 성찬식도 예수님의 몸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육신은 그대로 있다. 포도주는 그대로 있고, 빵은 그대로 있는데, 주님께서 영적으로 함께하시는 것이지, 그게 성찬식에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 아니다”라고 주장을 했죠. 그래서 그 화채설을 거부했기 때문에, 천주교회에서 위클리프를 위한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하게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우리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 한참 전에 이 위클리프가 종교개혁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위클리프의 후계자들은 롤란드라고 불렸는데, 롤란드라고 하는 말의 뜻은 중얼중얼중얼거린다고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교회에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자꾸 설명하니까, 말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죠. 그러니까 설명을 많이 해줘서, 이런 그런 후계자들이 있는데, 이 후계자들이 위클리프의 뜻을 따라서, 종교 개혁적인 역할들을 많이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존 후스 얀 후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이 후스라고 하는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 프라대학교의 총장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성경 말씀을 잘 연구하면서, 현재의 교회가 성경에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성경적인 교회가 돼야 된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결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경이 가장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라고 주장을 한 거죠. 이게 우리 개신교의 그 원칙하고 일맥상통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의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 보니까 면죄부를 그 당시 중세교회에서 많이 팔았는데, 중세 교회에서 면죄부를 무슨 명목으로 팔았어요? 성전 건축해야 되니까 헌금해라. 또는 전쟁에 나가야 되니까, 거룩한 전쟁을 해야 되는데, 헌금해라 하면서, 면죄부를 판 거죠. 그래서 그 헌금을 하게 되면 구원을 받는다. “헌금한 만큼 구원을 받는다”라고 이야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면죄부를 샀는데, 얀 후스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 면죄부를 사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것을 얀 후스도 이야기를 했고, 또 전쟁을 위해서 면죄부를 파는 것을, “전쟁을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거룩하다고 선포한 것 잘못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개혁을 말하면 교회가 가만 놔두나요? 안 두죠. 지금 종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위클리프나 얀 후스나 이런 사람들이 눈에 가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콘스탄스 회의에서 체포하고 처형하게 됐는데, 사실은 이제 콘스탄스 회의를 열면서, 황제가 얀 후스한테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해서 종교회의에 와서 한번 설명을 해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으니 설명을 해라. 그렇게 하니까 지금 나를 체포해서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못 가겠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황제가 내가 신변을 보호해 줄게. “신변을 보호해 줄 테니까, 와서 너의 입장을 잘 설명해라”라고 이야기해서, 결국 이 얀 후스가 콘스탄스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교황이 체포해 버리고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가지고 사형 언도를 받게 됐는데, 얀 후스는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나는 공의로우시고 전능하신 예수님께 항소한다. 그리고 나의 목숨을 우리 주님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오류가 있는 회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다.” 이야기하면서 그 자신이 주장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결국 얀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죽게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위클리프나 얀 후스나, 존 후스라고 하는 사람이나, 이 사람들은 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 이 체코에서 이렇게 종교 개혁의 바람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체코에 있던 학생들이 영국에 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위클리프의 책들을 가지고 체코로 들어와서, 체코에서도 그 위클리프의 영향이 많이 퍼져버려서, 그렇게 얀 후스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열망을 가지고 계속 개혁하려고 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개혁의 열망들이 모아지고 모아지고 모아지고 모아지고 계속 흘러서 나중에 존 칼빈이라든가, 마틴 루터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빵 하고 태어난 게 아니라, 사실은 위클리프나 후스나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계속 받고, 또 그것이 축적되고 축적되어서, 결국 종교개혁 시대 때 칼빈과 루터나 츠빙글리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이렇게 개혁의 갈망이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르네상스의 영향이 컸을 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들어봤나요? 고등학교 나왔으면 들어봤을 거예요. 그죠?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이 중세 시대 때 있었는데, 이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문예 부흥입니다. 문예 부흥. 문예 부흥이라고 하는 건 무엇이냐? 옛날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이나 이런 것들을 다시 연구하고 하면서, 고전 문학을 다시 한번 이렇게 붐을 일으킨 것이 문예 부흥이라, 학예 부흥이라, 그래서 그것을 프랑스 말로 르네상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중세시대 때는 중세시대 때는 그런 학문들이 좀 죽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옛날 고대 그리스 철학, 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로마 이런 문 예술 이런 것들이 굉장히 꽃을 피웠었는데, 중세 시대에 들어가면서, 그런 학문과 예술들이 좀 잠잠해졌고 시들해져 버렸어요. 그러면서 그저 장사하고 이런 농사짓고 돈벌이 아무튼 이런 쪽으로만 많이 가 있었다가, 나중에 이제 중세가 좀 어느 정도 지난 다음에, 다시 고전 문학들 이런 것들이 다시 발견하게 됐는데, 이런 르네상스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경제 능력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역을 하면서 경제생활이 풍부해지니까, 고전 문물들을 유입하면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십자군 전쟁을 하면서, 전쟁을 하러 저 이슬람 사람들하고 전쟁을 하다 보니까, 이슬람권이 가지고 있던 문물들을 가지고 들어오게 된 거죠. 이슬람 사람들이 고전 문학들 이런 것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하러 갔다가, 거기서 고전 문물들을 많이 가져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역사의 흐름을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무역의 발달이나 그리고 이런 십자군 전쟁이나 이런 것들이 한편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면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고전이 다시 들어오게 되는 그런 결과를 빚어지게 된 것이죠.

그런데 고전 문물이 들어온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도 들어온다는 얘기예요? 성경도 원문으로 보는 일들이 가능해졌다고 하는 일이죠. 전에는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중세시대 때는 그냥 전통대로 그냥 교회가 알려주는 대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냐면, 아 그 옛날 찬란했던 고전 문학으로 근원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정말 “옛날 그 고대 문헌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해서, 학문적으로 막 들어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성경 원문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이 르네상스로 인해서 성경 원문을 더 접하게 됐고, 그래서 교회가 성경과 좀 많이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 르네상스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아주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겁니다.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자꾸만 붐을 일으키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이 시대에 인쇄술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인쇄술의 발달이 세계 최초의 활자가 무엇이죠? 구텐베르크? 아무튼 우리나라 무슨 저게 아주 굉장히 오래됐다고 하는데요. 아무튼 유럽 쪽에서 보면 구텐베르크 활자, 이런 것들이 그때 발명이 돼가지고, 그래서 인쇄술이 발달해서 책들을 많이 찍어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성경책을 소유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성경을 직접 개인들이 구입하고 볼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그래서 르네상스가 발달이 되고, 또 종교개혁의 열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중세시대 때 스콜라 신학자들이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성을 가지고 신앙을 설명하려고 했었던 시도가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죠?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안셀무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시도들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런 이성으로 신앙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더 학문적으로 모든 것들을 다 잘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르네상스로 인해서 많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종교개혁의 열망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나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서부터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 정말 힘들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서 그것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것이 종교 기독교가 인정받으면서 국교화되고 해서 좋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게 타락의 길이었고, 결국 그 기독교가 참된 신앙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 중세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그래서 사실은 이 중세를 가리켜서 암흑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신앙의 암흑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암흑기를 그냥 내버려 두셨는가?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신앙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심어놓으셔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개혁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나게 되고, 결국에는 종교개혁까지 이끌게 되는 그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중세 교회사를 쭉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어가면서, 지금 타락이 심해지고 하는 것들이 심해지고 심해지고 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거기서 참된 신앙을 갖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개혁하고 바른 교회로 만들어가는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세상의 역사와 더불어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어쩌면 중세와 비슷한 증상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도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교회의 어떤 교권들이 하나의 이권이 되어버릴 가능성들이 언제나 상존하는 겁니다. 항상 그렇잖아요? 옛날 구약시대 때 보면 제사장들이 그 제사를 드리면서 참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야 되는데, 그 제사장들이 타락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사람들이 그 재물들을 자기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취하는 일들이 그렇게 타락하는 일들이 발생을 했었고,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기관들도 마찬가지고, 하나의 종교 권력을 자기들이 가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타락한 일들이 일어나게 됐는데, 그것이 다시 중세 교회 때 교황이나 이런 사람들이 또 타락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됐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도 그런 역사를 계속해서 반복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참 타락한 것이어서, 참 믿음으로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주는 여러 가지 이권과 그런 권력들이 타락의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이럴 때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이 위클리프나 아니면 후스나 이런 사람들이 성경적인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가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교회의 개혁을 이끌어 나갔던 것처럼, 우리도 작은 목소리지만 성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게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래서 조금 사람들이 별로 안 알아주지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이게 옳다고 그냥 저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저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별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믿는 것은 진리는 힘이 있고, 결국에는 사회를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하는 그런 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바로 설 수 있는 우리가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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