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시기와 질투라는 색안경 (삼상 18:6-12)

코로나19로 인해서 사람들이 잔뜩 긴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라고 하는 바이러스가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보신 적 있습니까? 아무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는 너무나도 작은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감염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기도 하고요. 악수 대신에 팔꿈치로 인사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발로도 인사를 하고, 여러 가지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게 정확하게 통계를 낸 것은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니까,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금년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양로원 같은 경우에, 매년 이 기간 정도 되면 몇 분씩 돌아가셨는데, 한 분도 금년에는 안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런 양로원 이야기들도 종종 듣고요. 여러 목사님들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평상시에 이 기간 동안이면 몇 분 정도 교인 가운데서 돌아가셨는데, 금년에는 장례를 한 번도 안 치렀다고 하는 그런 목사님들도 계시고, 또 들리는 이야기에 소아과나 내과에 환자가 안 온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도 들립니다.

모두가 다 손을 열심히 씻고, 마스크를 끼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까, 다른 병들, 감기나 여러 가지 우리가 흔히 앓는 그런 질병들도 앓지 않아서, 오히려 건강하게 그리고 잘 살고 있다고 하는 그런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코로나19와 같은 질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영적인 질병 영적인 바이러스는 코로나19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코로나19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 걸릴 수 있는 이 영적인 바이러스 영적인 질병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코로나19에 걸리게 되면 아프게 되고 또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우리가 영적인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면, 치명상을 입고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영적인 바이러스도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아주 심각한 영적인 질병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비하기 위해서, 더워도 마스크를 쓰고, 힘들어도 여러 가지 조심하면서, 그렇게 조심조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훨씬 더 치명적인 영적인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영적인 바이러스 영적인 질병 가운데서,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영적인 바이러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코로나19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접촉이 되면, 비말을 우리가 취하게 되면, 그러면 여지없이 전염병에 걸리게 됩니다. 천하장사라고 해서 코로나19에 안 걸리나요? 그게 아니죠. 아무리 건장한 사람도 전염병 바이러스에 노출이 되면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영적인 바이러스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혀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장담을 할 수 있는 분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만 걸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자주 만나게 되는 바이러스이고,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주의 일을 하겠다고 헌신한 사람들에게서조차도 나타날 수 있는, 헌신한 사람들에게 조차도 드러날 수 있는, 그런 치명적인 영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어떤 결심을 했나요?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족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이 바로 12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결단을 하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이에요! 어떤 부자 청년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다 팔아버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면서 근심하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 그런 결단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었던 12명의 제자들에게서도 시기와 질투의 질병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한 번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지간이었는데,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에게 이러한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나라가 된다면 우리 한 아들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또 한 아들은 예수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세요.” 어쩌면 어머니라고 하면 할 수 있는 그런 부탁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냐면, 다른 제자들이 들었어요.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난 다음에, 그 다른 제자들이 모두가 다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기 시작한 거죠. 누구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타났는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랐던 바로 그 열두 제자에게서, 시기와 질투의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이죠.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해서 시기와 질투의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에 면역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다고 해서, 거기에서부터 면역력이 생겨서 나는 안전한 경우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인정 많이 받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박수를 받는 것 같고,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우리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괜찮은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영적으로 망가뜨리고,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는, 그런 엄청난 그 대가가 따르는 그 위험한 영적인 질병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사무엘상 18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의 등장에 시기와 질투에 휩싸인 모습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블레셋의 장군을 물맷돌을 가지고 물리친 용감한 영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민족으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을 때, 그때 이스라엘 민족의 풍전등화와 같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구세주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고, 이 다윗은 간단하게 그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일약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하면서 돌아오게 되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다윗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노래를 불렀습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얼마나 기쁨과 감격 가운데 이 노래를 불렀겠습니까? 죽을 줄 알았는데, 당시 옛날에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전쟁입니까? 전쟁에서 지게 되면, 진 나라의 백성들은 다 노예가 되는 겁니다. 진 나라의 백성들은 다 목숨을 잃거나, 손가락이 잘리거나, 인을 지지거나, 엄청난 고난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모두가 다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나타나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하는 겁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었던 사울의 마음 가운데, 시기와 질투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다윗을 칭찬하고 높이는 노래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울을 깎아내리는 노래는 아니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사울과 다윗을 다 함께 높인 노래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는데요.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표현이 성경 여러 곳에서 특히 시편 같은 데서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러니까 시온에 있는 딸들은 크게 기뻐할 것이지만, 예루살렘의 딸들은 즐거이 노래를 불러라. 두 사람을 갈라서 역할 분담을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부녀들아, 너희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고, 모두 즐거이 노래를 불러라.”라고 하는 의미에서 표현할 때, 히브리 평행법을 사용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이 표현법을 이해하는 방법은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4장 25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의 말씀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 히브리 평행법에는 반어법적 평행법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평행법이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연구를 해서 해석을 해야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이 히브리 평형법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를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묶어서 같이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를 합니다. 뭐라고 노래했습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러니까 “사울은 천천만 죽였고, 거기에 비해서 다윗은 만만이라 죽였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웅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우리 이스라엘에게는 사울도 있고 다윗도 있는데, “그 영웅 사울과 다윗이 적군 천천을 죽이고 만만을 죽였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사울에게는 천천만을, 연고전이라고 하는 말도 있고, 고연전도 있는데, 다 무슨 얘기입니까? 다 아주 훌륭한 두 대학이 같이 체전을 한다는 얘기잖아요? 다 높이는 얘기예요. 연대도 높이고, 고대도 높이는 말이에요. 그런데 고려대 학생들은 꼭 고연전이라고 그러고, 연세대 학생들은 꼭 연고전이라 그러고, 그래서 누가 고연전 그러면, 연세대 학생들 화내고, 사실 그게 아니에요. 함께 높이는 거예요. 함께.

그런데 이 사울 왕이 시기와 질투의 색안경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다윗에 대한 미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시기와 질투에 색안경을 끼게 되면, 모든 것들이 다 뒤틀려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이 뒤틀려서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잘못된 색안경을 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내가 빨간색 안경을 끼고 보면, 이 세상이 온통 빨개 보이는 것이죠. 근데 문제가 세상이 빨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잘못된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것이죠.

아무튼 이 사울은 이 다윗을 바라보면서, 시기와 질투의 색안경으로 다윗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결과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첫 번째는 사울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어떤 순간입니까? 기뻐해야 될 순간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 가운데 있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어요. 골리앗을 무찌르게 됐어요. 그러니까 모든 나라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해야 되는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그리고 이 순간에 가장 기뻐해야 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왕 사울 왕이 기뻐해야 되는데, 놀랍게도 그 사울 왕이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사라져 버렸습니까? 요즘 사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는 것이 재미가 없으십니까?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혹시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색안경이 끼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안경을 회복하는 그런 귀한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시기와 질투의 색안경을 끈 결과, 사울은 다윗을 친구나 협력자나 동지로 보지 못하고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적이 누구입니까? 적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싸워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은 다윗을 어떻게 취급했는가? 함께 협력하는 협력자 같이 일할 수 있는 동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싸워서 물리쳐야 할 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과 협력이 불가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죽일 수 있는, 그 창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내가 누구를 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평화의 악수를 누린다고 한다면,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적으로 만들면, 결국 그 피해가 누구에게 오는가? 누구에게 오겠습니까? 그 사람에게도 가지만, 가장 큰 피해는 나 자신에게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울 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디서 최후를 맞이하나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전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투의 현장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사울 왕이 죽게 되었는데, 왜 죽습니까? 그 전투의 현장 가운데, 다윗이 동지로 있지를 않는 거예요.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쫓아내 버렸고, 적으로 만들어 죽여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다윗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다윗은 블레셋의 진영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겁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는 다윗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다윗이 나를 도와주고, 나를 보호해주고, 나에게 큰 유익을 끼쳐줄 그 다윗을 내가 적으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 블레셋의 칼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와줄 수 없는 상태로 내가 밀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결국 사울이 그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 것이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죽은 것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은 창을 던지기도 했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죽이려고 했지만, 죽은 것은 다윗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에 자기 자신이 죽었다고 하는 이 사무엘상의 말씀을 우리가 심각하게 묵상하면서, 시기와 질투가 나 자신을 죽인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탄이 우리 편인 척하면서, 내 마음에 욕망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시기와 질투심을 발휘해서, 결국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색안경을 주는 것이죠. 오늘 우리들은 코로나19에 혹시라도 걸릴까 봐, 정말 긴장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럽니까? 그렇지 않고 있습니까? 그러고 있죠! 저도 그래요. 지난주인가요? 아무튼 얼마 전이었는데, 부산에서 한 목사님이 저를 방문했어요. 여기 전라북도에 무슨 일이 있다고, 오는 김에 저를 만나겠다고 해서, 제가 그 목사님에게 음식 대접을 맛있게 해 드렸습니다. 근데 음식을 같이 먹고 있는 있는데, 목사님이 전화를 받는 거예요. 전화를 받는데, 누구한테서 전화가 왔냐면, 그 교회, 목사님의 그 교회의 부목사님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그 부 목사님이 뭐라고 전화를 하냐면, “목사님, 오늘 아침에 좀 상태가 많이 안 좋았었는데요. 그래서 오늘 아침 굉장히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었는데, 오늘 저녁때 보니까, 열이 펄펄 나고 온도가 많이 올라서, 제가 좀 조심스러워 가지고, 그래서 내일 코로나19 테스트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긴장을 했겠습니까? 아니, 그 부 목사님을 만난 목사님과 내가 지금 저녁을 같이 먹고 있는데, 바로 코 앞에서 침방울 튀기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큰일 났다 생각이 돼서 집에 들어갔더니, 제 아내가 소독약을 막 저한테 뿌리면서,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고, 얼마나 찬밥 신세가 됐는지요. 목사님한테, 그다음 날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그 부 목사님 검사받았답니까?” “네, 받으러 갔답니다.” 어떻게 됐느냐? 아직 모른답니다. 그다음 날 또 문자를 보냈어요. “목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음성이랍니다. 그래서 안도에 한숨을 내쉰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코로나19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시기와 질투의 영적인 바이러스가 있는데, 우리가 그냥 무방비 상태로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여, 시기와 질투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모두 하나의 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하나의 팀입니다. 축구선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축구 선수들이 운동 경기를 하다가, 선수들의 마음 가운데, 한순간에 시기와 질투의 바이러스가 들어가게 되면,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패스를 합니까?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저 선수에게 골을 주어서 볼을 주어서, 저 선수가 넣게 되면, 저 선수가 영광을 받는다고 생각되고, 그게 시기가 나고, 질투가 나면, 그 축구팀은 망하는 겁니다. 저 선수가 넣는 것을 우리 팀이 이 걸로 함께 기뻐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함께 이겼다고 하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축구팀이 되는 것이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죠.

가정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적이에요? 팀이에요? 팀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고 격려하면서, 하나의 동료가 되어서 협력자가 되어서 일을 해야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고, 싸우고 싸우다가 망해가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서로 동지가 되지 못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망해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그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목사님 때문에 시험받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언제 시험받습니까? 목사님한테, 목사님이 누구 칭찬하면, 그것 때문에 시험 들어요. 근데 제가 누구를 칭찬하고 격려하면 왜 칭찬하고 격려하겠어요? 연약한 그릇이니까. 뭔가 망가질 것 같고, 뭔가 부족한 것 같고, 그러면 힘내시라고 용기를 얻으시라고 그렇게 격려하고 축복해 주면, 그것을 보고 주님의 좌우편에 우리 아들 앉게 해달라고 하는 그 말에 시험 들었던 12 제자들처럼, 그 말 한마디에 시험 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좋은 말 하는 것도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몰라요. 이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거 시험 들으면 어떡하나? 조심하면서 말하고 있는데, 성도 여러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함께 칭찬하고 함께 격려하고, 함께 사랑의 손을 내밀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요? 우리가 적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저한테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저한테는 그렇게 칭찬하지 마세요. 저는 약한 사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사랑 시기와 질투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볼 때는 전혀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하기를, “자네 아들이 자네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말하면 기분이 나쁩니까? 좋습니까? 좋아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똑똑한 아들이 나왔지?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 나쁩니까? 좋아요! 왜 우리 자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니까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낳은 부모가 자기 자식이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박사를 받고 가면, 그 아들을 보면서 그 자녀를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졸업식장에서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선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갈 때는 애통해하셨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면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냐면, 스바냐서 3장 17절의 말씀처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악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질투하신다고 하는 의미인데, 그게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잘 되고 돌아오는 것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망하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또한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며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시기와 질투에 색안경을 끼고, 온 세상을 뒤틀리게 바라보는 그런 삐뚤어진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의 안경을 쓰고, 사랑으로 손길을 내미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며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마다, 시기와 질투의 안경이 아니라, 사랑의 안경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시기와 질투의 안경이 아니라, 사랑의 안경으로 보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감싸주고 격려하고,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박수 쳐주고 좋아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기쁨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