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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할 수 없는 영광 (롬 8:18-25)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부터도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고통들을 경험하면서 살게 되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 가운데 늘 질문이 떠오르는 겁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왜 이렇게 슬픔이 많고, 왜 절망적인 일들이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라고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그래서 어떤 획일적인 대답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단순한 대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살펴보면 이러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 대답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답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을 때, 어느 한 부분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각도에서의 대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종종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대답해 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 있는데요.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대답해 버리는 것은 옳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바라보게 되면, 그 고통을 빨리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 고통에 대한 대답을 너무 빨리 해주려고 해요.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곧 괜찮아질 거야.” 등등 여러 가지 그 고통에 대한 문제들을 빨리 어떻게든 없애보려고 하는 그런 조급함 때문에, 너무나도 쉬운 대답을 너무나도 빨리 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렇게 하기보다는, 빠른 대답을 쉬운 대답을 하기보다는, 우선 공감해 주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같이 울어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며 슬픔을 나누게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혼자 있으면 넘어지기 쉽고,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행복한 일이 있든 고통스러운 일이 있든, 혼자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우리가 같이 하고, 슬픈 일을 당해도 함께 함으로써, 그 슬픔을 조금씩 나누고 위로를 받게 해 주는 그런 역할이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슬픔에 같이 공감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대답을 해주고, 너무 빨리 있게 해주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죠. 울어야 될 필요도 있고, 슬퍼하고 애통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고도 빠른 대답을 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대답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이 고통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 인생 가운데 고통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 세상에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런 고통 같은 것은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허락해 놓으시는지, 허용하시는 것인지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우선은 그 모든 고통에 대한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우선적으로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은 원래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냐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너무나도 안타깝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만큼,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좋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는데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 세상에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생기게 되어 버렸는데, 이렇게 이 세상이 망가져 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설명하기를 그것은 바로 인류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우리 인생을 망가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켜버리고, 결국 우리 인생을 죽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게 되었고, 따라서 죽음을 향해서 가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인 설명이 될 것입니다. 좋았던 이 세상에 가시덤불이 생기고 엉겅퀴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싸움과 죽음과 슬픔과 고통들이 생겨난, 그래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 해주고 있는 대답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고통이 주어졌다고 하는 설명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면 복을 얻을 것이지만,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주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버린다면,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버린다고 한다면, 당연히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예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느 날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버립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서, 먼 나라로 가서 흥청망청 먹고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들은 모든 가진 것을 다 탕진해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릴 때, 그때부터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모든 것이 풍부한 그 아버지의 집에 있었다고 한다면, 심지어 하인들도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떠나버린 이 인생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들이 먹는 그 여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탕자의 비유가 바로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왜 고통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이 고난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냐 하면, “죄 때문에 고난이 생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대답이고, 또 하나의 대답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지은 죄,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오는 것이고,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설명이 성경에서 해 주는 기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으로 모든 고통을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악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선한 자에게 상을 내려주시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악을 행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런데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하는 것이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갑니다. 아프지도 않습니다. 장수합니다. 별문제 없이 떵떵거리면서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런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정말 믿음의 사람인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오히려 더 고난을 당하고, 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 대답이 해당이 안 되는 것 같다. 그 대답이 어설픈 대답 같다고 느껴지기에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여주는 아주 생생한 예가 성경에 나와 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욥이라고 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동방의 의인이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정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엄청스러운 고통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욥의 경우가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어떤 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만일 누구의 잘못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자기의 잘못 때문에, 그런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태어나기 전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어려운 상태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부모가 잘못했다고 한다면, 부모가 어려운 일을 겪어야지, 왜 그 아들이 그 어려운 일을 겪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 대해서 죄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케이스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정말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면,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때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제는 다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고난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죄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혹은 “죄 때문에 이 세상에 고통이 왔다”라고 하는 그런 설명이 다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고 너무나도 쉽게 말해버린다고 한다면, 그 고난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 될 것이고, 아주 무례한 대답이 될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요. 오늘 읽은 이 로마서 8장의 말씀은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이 경우에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설명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될 텐데, 고난을 당하게 될 텐데, 그 고난이 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었으며, 도대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오늘 말씀은 기록하기를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고난을, 지금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결국에는 무엇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까? 영광으로 연결된다는 거예요. 이 고난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의 과정을 겪은 이후에 영광으로 이끌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 8장 18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만나는 고난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고난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망가뜨려 버리는, 짓밟아버리는, 그래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짓눌러버리는 그런 엄청난 파멸로 이끄는 것이 고난이 아니라, 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으로 이끄는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마치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치 도자기를 굽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은 도자기를 빚은 후에, 이것을 불가마에 넣어서 굽는 것이죠. 불과 같은 그런 연단의 연단을 통과한 이후에, 멋진 도자기가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놔두어서 도자기가 멋진 도자기가 나올 수 없는 것인데요. 이 불가마를 통과해야, 그래야 멋진 도자기가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이 고난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무너뜨리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과 섭리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산통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들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별로 주사를 놓아 가지고, 별로 안 아프다고 하긴 하는데, 그래도 아프다고 그러긴 해요. 그런데 아기를 낳는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아픈 고통이라고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 겪어본, 제가 겪어본 것은 아니어서.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그 산통을 겪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그 산통을 견디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조금 뒤에는 드디어 기다리던 그 아기를 내가 안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소망 때문에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운데 반드시 고난이 있을 수 있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수가 있겠는데,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영광으로 이끌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엄청난 고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고, 그리고 차가운 그 감옥 가운데서 차꼬에 묶이고, 정말 어려운 일을 당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로는 자기 자신이 어떠한 고통을 당했는가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서 40배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3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의 삶을 보면 전부 고통이에요. 매 순간순간이 다 고통이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아주 시원시원하게 뻥뻥 뚫리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는 그런 모습을 산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늘 두드려 맞고, 돌로 맞고 죽을 뻔한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면서, 지금까지 엄청난 고난 가운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 사도에는 지병이 있어서, 육체의 가시와 같은 그런 질병을 늘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가운데, 그의 인생을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이 어떠한 고난이었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벌하는 그런 고난이 아니에요. 이 고난이 어떤 고난이었는가? 아무런 의미 없이 주어지는 고난이 아니라, 오늘 로마서 8장 18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결국 영광으로 이끄는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첫 번째 대답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답이 무엇이냐면, 그런데 그, 우리가 이 고난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영광은 너무나도 크다는 거예요. 엄청난 영광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광인데, 어떤 영광인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 같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이 아주 심각하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데, 그 고난의 강도가, 강도가, 그리고 그 영광의 강도를 비교해 본다고 한다면, 지금 당하는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새 발의 피라고 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고난이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영광이 너무나도 커서, 우리의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작아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엄청난 영광이 우리 가운데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맛집이라고 하는 곳을 찾아갑니다. 전주에는 어떤 맛집이 있습니까? 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소문난 맛집이 있어서 한 번 찾아가서 먹으려고 하면, 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기왕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뭐 하고 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얼마나 참 그 길이 줄이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예전에 한 번 왔던 강원도에 가 가지고, 물회가 맛있다고 해가지고, 막 기다리면서 한번 먹어봐야 되겠다 하고서 막 기다렸는데, 막 줄이 엄청나게 길더라고요. 그래서 막 번호표 받아놓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갔더니, 안에는 비어 있어요. 근데 밖에 줄 서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들어가서 먹었는데,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맛이 있었던 경우가 있습니까? 맛이 별로입니까? 아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맛있다. “기다릴 만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맛있기는 맛있는데, “과연 이렇게 줄 서서 먹어야 될 정도였는가?”라고 의심이 되는 경우도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말씀해주는 게 무엇이냐? 우리에게 주어진 그 소망 우리에게 주어진 그 영광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참는 그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지금 인내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 우리가 만나게 될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은. 로마서 8장 24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우리가 지금 그 영광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지금 인내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 영광이 그 소망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고, 아직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지쳐버리고 그래서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음식점 앞에서 기다리다 보면, 기다리다 못해서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그 영광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부터 떨어지고, 낙마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져야 됩니까? 마치 어머니들처럼 믿음을 가져야 돼요. 어머니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보는 거죠. 우리 아이를 안으면,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갓난아기를 낳게 되면, 그 갓난아이가 말을 할 줄 압니까? 손을 쓸 수가 있습니까? 걸어 다니기를 합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밖에 없어요. 먹고 싸는 것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런데 그 갓난아이를 안고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지금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갓난아이가, 내가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기르면,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손흥민과 같은 아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수가 있는 것이고, 지금은 코흘리개고,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 믿음을 가지고, 이 아이에게 훈련하면, 이 아이가 장차 어마어마한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고,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아이를 안고 기르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교사 선생님들은 정말 대단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이 아이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것이죠. 농부들은 씨를 바라보고 그 씨를 보고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심으면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열매를 얻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고, 건축가는 허 벌판을 바라보면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도시를 꿈꾸어내는 것이죠. 아 저 벌판에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들어설 수 있겠구나. 저 신시가지, 이 다리만 건너고 하면, 신시가지인데, 그 옛날 거기가 무엇이었다고 그래요? 저는 안 봐서 모르지만, 미나리깡이었데요. 그런데 건축가들에 의해서 엄청난 도시가 만들어지고, 효천지구가 만들어지고, 엄청난 것들을 만들어내는 그런 그 눈을 볼 수 있는 것이 건축가인 것이죠.

요리사는 무엇입니까? 요리사는 재료들만 보고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예전에 jtbc에서 했던 방송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냉장고를 부탁해>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게스트의 집에 가서 냉장고를 그대로 들고 옵니다. 냉장고를 그대로 들어오면, 그 사람이 그 집에서 그냥 냉장고에 썩혀 두었던, 묵혀 두었던 여러 가지 재료들 평범한 재료들이 있는데, 그 평범한 재료들이 셰프의 손에 들리게 되면 15분 만에 뚝딱뚝딱해가지고,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들이 만들어내지는 것이죠.

영적인 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장차 경험하지 못하는, 그 영광스러운 나라, 지금 우리가 지금은 보이지가 않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가 저 영광,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 엄청난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교훈해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5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무엇으로 기다릴지라? “참음으로 기다릴지라.” 영광을 얻을 때까지, 음식점 앞에서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우리가 기다리게 된다고 한다면,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냐면, 어떻게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에게 물어보세요. 어머니 산통은 어떻게 견디셨어요? 그 산통을 견딜 때,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영광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그 고통을 그 누구도 알아주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은 무의미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고통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키고, 그 우리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영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 영광을 바라보고 참으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절 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2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당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고통을 스스로 자취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성탄절인데, 저 높고 높은 영광스러운 자리를 주님께서는 버리시고, 가장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고, 거기서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까지 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놀라운 영광을 주시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겪으셨던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인내하시고 참으셔서, 결국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그날을 약속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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