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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메시지

– 이국진

기독교의 메시지는 배타적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것은 배타적인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처럼 종교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무례하지 않게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종교 다원주의적 메시지로 바꾸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근본주의적 신앙관으로 채색된 배타적 예수를 거부하고,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채색한 예수 신앙을 가질 것을 주장한 바 있다. 1) 어차피 신앙심을 가지고 한 차원 높은 영성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나 다른 종교나 다를 것이 없는데, 기독교만 옳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책 “예수는 있다”에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다른 종교의 메시지와 다르다는 것을 일일이 설명한 바 있다. 2) 기독교는 신앙심을 통해 한 차원 높은 영성의 세계로 올라가자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선을 쌓고 의를 행하여, 천국에 가자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무례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 전도를 배제하고, 단순히 사랑만 실천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단순히 섬기고 사랑만 실천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교활동”을 하러 가지 말고, “봉사활동”을 하러 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정답이 아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더 “예수 믿으세요”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할 수도 있다. 나도 종종 그런 전략을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선교정책을 “복음전파”에서 “봉사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책 ‘프레임 전쟁’에서 진보적인 진영에서 항상 중도층 공략에 실패하는 이유를 분석했다. 3) 그 이유는 진보진영 후보자가 중도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흔히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진정성을 잃는 것이며, 그의 정치기반을 허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오히려 보수주의 세계관을 활성화해 상대방을 유리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이며, 타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선교를 자제해야 한다는 비난을 받는 시점에서, 이와 같은 레이코프의 분석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둘러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명은 오히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이며, 타 종교를 무시하는 공격적인 선교를 하고 있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감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짜놓은 프레임을 인정하고 그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선교는 잘못된 것이고 봉사활동만이 가치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에 승복하는 꼴이 된다. 기독교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복음은 진리이고, 이 진리에 살 길이 있는데, 어줍지 않은 변명은 복음의 가치를 퇴색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이 진리임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담대하게 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전략적이지 못한 즉흥적이고 과시적인 선교행사는 복음전파를 방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데, 지혜롭지 못한 선교전략을 구사한 것이 사실이다. 무례하지 않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무례하게 행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봉사활동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반기독교적 정서를 활성화하는 프레임에 끌려가는 것일 뿐이다.

친하지도 않은데 농담을 하는 것은 무례한 것인 것처럼, 아직 제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복음을 무조건 선포하는 것은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4 하지만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만, 100%는 아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내던지는 도전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타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한 불신자들이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이유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거부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cf. 로마서 1:18). 물론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사랑의 모습을 전달해야 하지만, 마음을 얻는 방법만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돌이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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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오강남, [예수는 없다] (현암사, 2001[]
  2. 이국진, [예수는 있다] ( 국제제자훈련원, 2011[]
  3. 조지 레이코프, [프레임 전쟁] (Thinking Points: Communicating Our American Values and Vision), (창작과 비평, 2007[]
  4. 구교형, “’다빈치코드 깨기’식으로는 ‘다빈치코드’ 절대 못깬다.” http://www.newsnjoy.co.kr/news/ articleView.html?idxno=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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