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무례하지 않으려면

– 이국진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과연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 무례하게 지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종종 무례한 말을 하면서, “용서하고 들으세요”라고 말한다. 혹 “죄송합니다만 한 마디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가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라고 포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자신의 무례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례하게 전달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군요. 저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화시키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만이 옳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무례한 성도들을 종종 만나보았다. 무례함은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오히려 신앙의 길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무례함이 적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례함의 측면에서 보면, 신앙의 연륜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신앙이 잘못되어가는 이상한 도표가 그려진다. 여기에는 신앙적 교만이 관련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훈련되어 있기에, 종교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자들을 볼 때 자신과 비교하는 일이 없이 바라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종교적 교만이 따라오게 되며, 종교적으로 덜 훈련되거나 한참 뒤떨어진 자들을 향한 무례함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하게 된다. 교만이란 꽃을 피우면, 무례함의 열매는 자동으로 맺힌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서도 비난을 그칠 줄 몰랐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로마서 14:1). 신앙이 깊어질수록, 초보 신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무례함으로 그들을 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신앙적인 이유로 먹는 것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 서로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로마서 14:2-3).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는 행위는 무례한 것이다. 사랑의 모습일 수 없다.

무례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시각을 하나님께로 고정할 필요가 있다(로마서 14:4).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도 없고, 비판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종교적 철저함도 부족할 뿐일 터이니, 교만의 꽃을 피울 수 없고, 그 열매인 무례함도 맺을 수 없다.

* 목차로 돌아가기

* 다음 글 읽기 – 배타적 메시지

* 이전 글 읽기 – 저주가 되어버린 축복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