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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 이국진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과정에서도 교만한 마음이 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교만한 마음이 들 수 있다. 마치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존하신 하나님이지, 무엇인가 부족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의 예배를 요구하거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아테네에서 웅장한 신전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 17:24-25)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지 않으신, 문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존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손의 섬김이 필요 없다고 했던 바울은 다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 후서 8:9)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치 않으신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만(하나님이 가난하게 되셨으므로), 동시에 교만하지 않아야 할 것(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하신 분이므로)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교만하게 된 사람을 우리는 웃사에게서 본다.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다윗 성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웃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죽는 사건이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되어 있다.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옮기던 도중, 소들이 뛸 때 법궤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법궤를 구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웃사였다. 어쩌면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 웃사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죽이신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인데, 유진 피터슨은 이를 웃사의 영적인 교만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법궤와 같이 생활하면서, 웃사는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받아야 할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교만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함 때문에 웃사는 율법이 정한 방법을 무시하고, 법궤에 함부로 손을 댔다는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가두고, 세상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나님을 지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양 나서는 사람이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웃사의 반사적인 행동이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오랜 망상이 표출된 것이다…. 웃사는 … 모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무시했고!) 대신 불레셋식 최신 혁신 기술을 이용했다. 분명 편리한 황소 수레는 터벅터벅 걷는 레위인들보다 법궤를 운반하는 데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웃사는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는 담당자였으며… 계속해서 담당자 자리에 있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1

베드로 사도는 사랑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고 권고한다.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 전서 4:9-11)

청지기는 교만할 것이 없다. 주인의 의사대로, 주인의 물건을 처리하는 것이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물건을 가지고, 내 의사로 사용한다면 청지기가 아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을 바울 사도는 은사(gift)라고 한다.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와 같이 일시적인 은사(고린도 전서 13:8-13)보다, 영원한 은사(고린도 전서 13;13)이며 더 큰 은사(고린도 전서 12:31)인 사랑의 은사를 추구하라고 권면한다. 2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도 사실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의사대로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베풀면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사랑을 베풀면서 교만해지는 것은 청지기의 직분을 망각하는 것이다.

군대의 시스템은 부대장인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부대장의 어깨에는 지휘관임을 나타내는 초록색 띠가 붙어 있다. 하지만 부대장을 보좌하는 참모들은 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손과 발의 역할을 하는데, 이들의 군복에는 초록색 띠가 없다. 분대장인 병장의 어깨에는 초록색 띠가 있지만, 연대장의 참모인 소령 계급의 군수참모의 군복에는 그 띠가 없다. 초록색 띠가 없는 군인은 자신의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만일 군수참모가 탄약이나 부식을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참모로서의 자격이 없다. 예하부대에 지휘관의 명령대로 보급품을 보급하면서 위세를 떨 일이 없다. 보급품은 군수참모의 것이 아니고,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부대장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이니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교만해질 수 있는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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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1999), . 177-178. 웃사의 죽음이 제의적 방법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궤를 옮기려는 시도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읽지 못한 때문이었다고 해석한 김필회 교수의 글, “어떻게 야훼의 궤가 내게로 올수 있겠는가 – 사무엘하 6장에 기술된 하나님의 궤에 대한 신학적 고찰” (성경과 교회)를 참조하라.[]
  2. 종종 학자들은 더욱 큰 은사들(gifts)을 사모해야 한다고 복수로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가 좋은 길(way)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사랑을 소개했기 때문에, 사랑은 더 큰 은사(gifts)가 아니며, 단지 그 은사에 이르는 길(way)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리 있는 의견이지만, 그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더 큰 은사(gifts)로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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