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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지 않기 위한 제도적 장치

– 이국진

어쩌면 우리는 자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 자랑하기 위하여 구제를 하기도 하고,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홍수로 인하여 이재민이 생겼을 때, TV와 신문에서 수재 의연금을 걷는데, 액수에 따라서 사진과 이름이 따라 나오고, 순서가 결정된다. 예전에는 학교 운동회를 해도,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걸렸었다.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을 내고, 초상집에 가서 조의금을 내는 것도,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이다.

신학교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있다. 고든콘웰(Gordon-Conwell) 신학교에 가면, 기부를 많이 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님의 부부의 이름을 딴 기숙사(Graham Hall, Bell Hall)가 있고, 그래함 목사의 이름을 딴 장학금(Graham Scholarship)이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에는 도서관을 새로 증축하면서, 안드레아스 센터(Andreas Academy Centre)로 이름하였다. 그 건물을 짓는데 드는 대부분의 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고, 그 안에 사랑센터가 있다. 한국 사랑의 교회에서 지원한 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미국 교회에 가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물들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돈을 기부한 사람 혹은 기념할 사람의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미국 사회는 이렇게 기념하는 일을 통해서 기부를 장려하고, 그래서 부의 사회적 환원이 가능한 것 같다.

자랑하지 말라고 한 성경적 원리를 제도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에도 100% 무명으로 하면 어떨까? 하지만 거기에도 자랑의 요소는 충분히 스며들어갈 수 있는 틈새가 있다. “우리는 무명으로 한다”라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한 말씀을 100% 문자 그대로 실천하도록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제도를 만들어도, 자랑하려면 충분히 자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제도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는 말씀처럼.

이름을 새기는 것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않고, 기념의 개념으로 선행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장려하여, 사랑의 실천을 더욱 보편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장례식이 있을 때, 조의금을 유가족이 가져가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떤 기념사업에 돈을 모은다. 예를 들어, 스미쓰 씨가 죽었다고 하면, 유가족은 그 사람의 정신을 이을 수 있는 중요한 기념사업을 생각해낸다. 평소 인재를 기르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신학교에 스미쓰 장학금을 만들어 신학생을 양성하는 장학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의금을 모두 그쪽으로 보내도록 한다. 아마도 장례식 비용은 생명보험으로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구제할 때에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을 사회적 시스템이나 교회 내의 시스템으로 강제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며, 그만큼의 효과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마음의 자세를 향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제도화시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구제하고,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면서도, 그 마음속에 자랑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개인적인 차원의 말씀이다. 종종 개인적 차원의 말씀을 강제적인 사회 제도로 만들 때 문제가 생긴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한다.

C.S. 루이스는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 자체는 교만(자랑)이 아니며, 오히려 잘 한 것에 대하여 칭찬할 때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1 즐겁게 해주고 싶은 대상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마음이 뿌듯하고 기쁜 것이라면 좋은 것이다. 선한 일을 즐거워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바뀌어 자기 자신에 대한 교만으로 바뀌게 될 때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어쩌면 이론적 구분에 불과할 수 있다.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교만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면서, 그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한 세상이 될 것이며, 인간의 진보는 생각지 못할 것이고, 교육이란 절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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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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