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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민주주의적 결정

1. 교회가 민주적이어야 할 이유

장로교회 제도는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민주적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어로는 데모크라틱(democratic)이니까, 사람들 다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다수의 통치라는 것은 혼자만의 통치(dictatorship) 또는 어느 집단만의 통치(bureaucracy)와 비교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자 표현은 민주(民主)이니까,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것을 뜻하기에,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해를 살 법하다. 신앙적 관점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운영을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에 유독 반발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대에는 교회는 민주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본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하지만 민주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혼자 또는 일부 집단의 통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교회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옳다.

교회가 민주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의 구성원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하게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섬긴 장로라 할지라도 그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가르치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모든 결정을 성경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이 있겠는가? 따라서 혼자서 결정할 게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종합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다. 성경은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것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삿 17:6; 21:25) 사사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따라야 한다.

특히 목회자가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은 것처럼 말하고, 그러한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교회라면 아주 위험하다. 물론 그런 구조를 가진 교회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가지고 있는 교회보다 훨씬 더 탄력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니다.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다 보면 함께 구덩이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기도하는 가운데 받은 응답이라고 하여,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러한 방향 제시에 무조건적 순종을 하는 구조가 되면, 영적으로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많다. 자신의 아젠다가 강하면 성경의 우물에서 자신의 얼굴만 볼 것이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가 하나님께 응답받는 대로 움직이는 교회는 장점도 있지만, 위험도 내포한다.

2. 초대교회의 모범

초대교회는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시행해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바리새파 출신으로서 믿음을 받아들인 어떤 사람은 이방인은 당연히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행 15:5). 성경에 분명하게 할례를 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할례는 당시의 문화 속에서는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커다란 장애였었다(행 15:10). 그런 상황에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할까?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신다는 점에 주목하였다(행 15:7-9). 결론적으로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이방인 선교에서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권고할 것인지, 무엇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혼자 결정한 게 아니라, 토론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나갔다.

그래서 장로교회 제도는 다수의 원리(principle of plurality)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에는 목회자 한 명이 다스리지 않고, 복수의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모두가 이런 다스림에 참여할 수 없기에 대표를 뽑아서 의사를 대신하여 결정하게 하는 대의제도(representative system)도 장로교회의 아주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로써 교회는 민주적 운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로교회 시스템은 미국에서 국회의원들이라는 대표를 선출하여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게 하는 미국 민주주의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3. 민주적 결정보다 거룩한 결정

하지만 민주적 결정이 능사만은 아니다. 특히 교회의 구성원들이 성경적인 가르침에 복종하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을 때에 그렇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구하고 자신의 아젠다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겸손하게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민주적 결정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결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타락한 영향을 받는다면 거룩한 결정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권고를 들었지만, 그렇게 염려해주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는 조언을 주변으로부터 들었지만,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사실 민주적 결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거룩한 결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거룩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룩한 결정을 위한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하려는 성도들의 겸손한 마음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며, 나와 다른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려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교회 내 의견이 갈리는 문제를 가지고 결국 교회가 민주적인 결정을 하겠다고 하면서 투표를 실시하였다. 결국 다수의 의견에 따라 문제를 결정했고, 그 결정대로 교회는 움직였다. 하지만 결국 의견이 배제된 교인들은 그 교회를 떠났다. 과연 이러한 민주적 결정이 옳은 것일까? 소수의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것인데, 다수결로 결정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 민주적 결정일까? 그런데 그 기저에는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이 깔려있다.

사실 민주적 결정과 거룩한 결정은 서로 반대 개념이 아니다. 민주적 결정의 반대 개념은 독단적인 결정이고, 거룩한 결정의 반대 개념은 거룩하지 못한 결정이다. 민주적 결정을 통해서 거룩한 결정이 나올 수도 있고, 거룩하지 못한 결정이 나올 수도 있다. 엄밀하게 말해, 민주적 결정이란 방법론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룩한 결정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게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점에 고민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결정이고 거룩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 되면, 나쁜 결정으로 평가되는 시대이다.

4. 거룩한 결정을 위한 소통의 필요성

거룩한 결정은 바른 결정이다. 우리는 어떻게 바르고 거룩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사실 진리는 너무나도 커서 우리의 알량한 머리로는 다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파악하기보다는 한쪽 측면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객관적인 자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문화의 지배를 받는 자리이고,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모든 영향력 속에서 바라보는 자리이다. 그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고, 나와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원통을 어느 한쪽에서 보면 동그라미처럼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직사각형처럼 보이는 것처럼, 똑같은 것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때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너무 확신한 나머지 자신이 옳다고만 주장하면, 바른 결정이 내려질 수 없다. 나와 다른 의견이 있다면, 혹시 나와 다른 각도에서 다른 측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의견이 넘치면 더욱 진리에 접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다. 민주적 결정은 무조건 다수의 뜻에 따라 결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통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작업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비추어보는 과정이다. 민주적 결정은 대화이며 설득이며,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결정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것이 생략된 채, 단순히 무엇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인가를 따진다면 엉뚱한 결정이 될 수 있다.

5. 민주적 결정에 익숙한 시대

예전에는 목회자의 권위가 컸다. 목회자의 결정이면 교회 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민주적 결정에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의 구성원들이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조건 밀고 갈 수는 없다. 적어도 설득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대화를 통해서 좀 더 바람직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몇 년 전에 교회당을 매입하고 증축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모두가 다 교회당을 매입하는 것에 찬성했기 때문에, 교회당을 매입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그 동안 교회가 상가에 있으면서 많은 월세를 부담하던 것에 비하면, 자체 건물을 소유하는 것은 교우들이 바라는 소망이었고 이점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교회당을 매입한 바 있다. 그런데 교회당이 좀 작아서 우리가 쓰기에는 아쉬운 면이 많았었다. 그래서 입당하기 전에 증축을 진행하기로 했다. 거기까지도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어느 규모로 증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사택이 있는 3층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그곳에 중 2층 예배당을 새로 만드는 것을 원했다. 본당이 중 2층 구조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교우들의 생각은 달랐다. 본당이 작고 천장이 높지 않더라도, 원래 있는 그대로 2층을 본당으로 사용하는 것을 원했다. 재정적인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결국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2층을 본당으로 하는 증축을 진행했다. 지금은 매우 아쉽다. 그때 조금 무리해서라도 3층 본당 안을 밀어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민주적 결정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쉬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담임목사의 의지를 독단적으로 관철시키지 않고 민주적 결정에 따랐다는 데 있지 않다. 만일 담임목사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보다 옳았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밀어붙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건물은 좀 더 좋게 지어졌을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다수의 의견이 옳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설득의 과정을 거치면 된다. 의견을 충분히 듣고 존중한다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에도 마음이 열릴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민주적 결정을 했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충분히 소통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민주적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 수고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6.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앙

문제는 교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회 안에는 참된 성도도 있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 안에 잡족이 있었고 그들이 불평을 일삼아서 결국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과 같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짜 신자들은 교회의 방향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위험이 있다. 민주적 결정의 위험은 그러한 가짜 신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데서 온다.

결국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적인 그룹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선별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 믿음의 의견들이 존중받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의 민주적 결정은 믿음의 성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이 없는 곳에서의 민주적 결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는 풀어주라”는 소리에 끌려다니는 빌라도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게 우리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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