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 (잠 11:3) +++ 배려와 멸시 (잠 11:12-13)

이 세상은 참 엉망징창입니다. 비교적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의롭게 산 만큼의 보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정말 사악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정말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참 엉망진창처럼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것들이 참 절실하게 느껴졌던 때가 언제였냐면 왜정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왜정시대에 승승장구하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잡히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온 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아주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고 그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합니다. “안 되는구나!” 예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뒤에서 후원했던 뒤에서 돕던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변절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다 소용없다고, 그렇게 해봤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변절이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어쩌면 우리 왜정시대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둘씩 변절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볼 수가 있는데요. 그렇게 변절하게 된 것은 조선이 다시 독립할 것을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조선의 독립은 오지 않는 겁니다.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힘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다시 저 막강한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우리나라가 다시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가망성은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결국 일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 체념과 푸념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전향을 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자식들이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전향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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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정시대 때 그러한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러한 일들이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르고, 악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그런 참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면서, 사람들은 영적인 변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양심에 따라서 살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다 소용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변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변절이 자꾸만 일어나는 한 가운데 그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들을 향해서도 계속해서 이 세상은 계속해서 유혹하는 겁니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의롭게 살아봤자 쓸모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봤자 너만 손해 보는 것이다고 하는 그런 유혹의 소리들을 자꾸만 들으면서 전향을 하라고 하는 그 목소리 앞에 우리는 흔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살려면 전향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이 세상에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 의로움은 다 내버리고 이 세상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번민 고민들이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그렇게 영적인 변절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요. 그렇게 영적인 변절을 할 게 아니라, 의롭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고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11장 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언서는 오늘 분명하게 우리를 향해서 선언하고 있는데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재물이 최고고 재물이 있어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의롭게 살면서 가난하게 살 것이 아니라, 정의를 지키면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고 악과 타협을 하면서 그래서 제물을 많이 쌓아서 그렇게 제물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장땡이라고 우리를 향해서 유혹하고 있는데, 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은 우리를 건질 능력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물이 우리를 건져낼 능력이 없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크리스찬들은 재물을 멀리하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제물이 우리를 건질 수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있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은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유익합니다. 재물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고, 조금 가지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진다면 훨씬 더 더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이 우리를 건질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이 본문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재물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없는 것이고, 재물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살릴 능력이 재물에게는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재물의 유용성을 알기 때문에, 그 재물의 유용성을 너무나도 좋게 평가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재물이 유용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넘어서서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용성이 있는 겁니다. 재물이 있으면 아주 편리하고 도움이 되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모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유용한 것이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재물의 유용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데요. 여기에도 유용하고, 저기에도 유용하고, 여기에도 유용하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유용한 것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재물의 유용 정도가 아니라 재물은 전능하다고까지 착각하게 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재물이 전능한 게 아닐까?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돈이라고 하면 못할 것이 없고, 결국은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부터 해결해낼 수 있는 재물의 전능성이 있다고 믿게 되는 그런 결과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재물은 유익할 수는 있지만 전능하지는 않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이 유용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재물을 수단으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불을 잘 사용해서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듯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그 유용성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유용성을 이용해서 많은 이득을 유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물을 우리가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재물의 유용성을 넘어서서 전능성에게까지 우리가 기대를 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그 재물이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가 섬기는 신의 위치에까지 올라가 버리게 되는 겁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전능하신 그 재물 앞에서 내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그 재물이 시키는 대로 재물이 자신이 내가 그 유용성을 줄 테니까 전능성을 줄 테니까, 내 말에 복종하라고 그 재물이 우리를 시키는 대로 재물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대로 그 재물에 복종하면서 사는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분명하게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는 있지만, 오늘 4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를 살릴 수 없다. 궁극적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예일 뿐이요.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재물은 전능성이 없기 때문에, 결국 진노의 날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재물이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우상을 섬길 때, 당하게 되는 피해를 우리가 고스란히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되고 기쁨이 넘치고, 우리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풍성함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게 되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 우상이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채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착취해 가듯이, 우리가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결국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 그 전능하신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 결국 우리가 피해를 당하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그 점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재물은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없고 전능성을 갖지 못한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가? 4절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공의가 우리를 살린다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의가 우리를 살린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살 길이지, 재물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살 길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의를 따라 살게 되면 성경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 성경 말씀대로 우리들의 현실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느냐? 이것이 우리들에게 문제인데요. 우리가 의를 따라 살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고, 재물을 따라 살게 되면 망하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야, 그래야 좋은 것인데, 성경 말씀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가 있고 망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러한 일들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보디발의 집에서 정말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 것이죠. 주인을 섬기되 정말 주께 하듯이 섬겼고, 거룩하고 의롭게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디발의 집 안에서 얻게 된 결과가 무엇이냐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악을 행한 사람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아무런 죄가 없이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나게 된 거예요.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구나라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요. 또 하나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믿으며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을 것인데, 놀랍게도 요셉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신원해 주시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높여주시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환난에서 무엇을 얻으나?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의인은 어떻게 된다고요? 구원을 받는다. 요셉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요셉이 역전이 된 것처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고, 악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악인은 어떻게 된다고요? 자기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길은 무슨 길입니까? 악인이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죠.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번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의인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의인은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도대체 의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1번.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죄가 하나도 없이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 2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사람. 1번일까요. 2번일까요? 2번처럼 생각되시죠? 틀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단어의 의미가 어느 한 곳에서 정의된 그 의미를 다른 곳에도 무작정 대입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성경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신X지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데요. 단어의 의미는 모든 것의 의미는 그 문맥 안에서 살펴보아야 제대로 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도, 똑같은 말도, 똑같은 표현도 이 상황에서 하는 말과, 이 상황에서 하는 말과, 이 상황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코미디언이 농담을 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상황에서 했던 그 말과, 그리고 재판정에서 나오는 그 말과, 그리고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나오는 말이 문자적으로는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단어 그 표현이 어느 세팅해서 전해졌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번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 단어의 의미를 모든 성경 구절에 천편 일률적으로 대입해서, 그래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예요.

성경에 사용되는 의인의 개념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개념도 있어요.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느 구절에서 그런 의미로 의인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할 때는 그런 의미의 의인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그 의인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완벽하게 살아서 죄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그런 의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의인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선언받은 그런 의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법정적인 의미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의의는 무슨 의미일까요? 1번도 아니고 2번도,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닌데, 그럼 뭐냐? 3번입니다. 3번을 제가 얘기를 안 해줬어요. 죄송합니다. 3번은 뭐냐하면, 완벽하게 의로운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하게 살고 싶은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애쓰고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의인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럼 반대적으로 어떤 사람이 여기서 악인입니까? 악인도 성경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각각 다를 수가 있겠는데요. 그 악인은 어떤 악인, 여기서는 어떤 악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아니 구약 대부분의 문맥에서는, 신약이 아닌 구약의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3번의 의미로 의인이 주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9절 말씀에서는 노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표현하고 있고, 완전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면 노아가 지금까지 죄를 하나도 지은 것 없고 한 번도 미워한 적도 없고 한 번도 화낸 적이 없고 한 번도 교만한 적이 없고 한 번도 시기와 질투도 없이 정말 예수님같이 똑같이 완벽한 그런 의인이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에요. 노아가 당대 의인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대의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노아만큼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했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면서 살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그런 노아가 실수가 있었겠어요? 없겠어요? 있었을 거예요. 어떤 때는 잠자고 있는데 누가 괴롭히면 신경질도 낼 수도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 조그마한 잘못들을 많이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당대의 모든 악인들에 비하자면, 그는 의로운 사람임에 분명하고, 그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 비하면 완전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욥기 1장 1절에서도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스 땅의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욥에게 가서 욥을 먼지를 털어보니 먼지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한, 하나님께서 그 욥을 보면 “너는 죄를 하나도 안 졌네. 그냥 천국에 와.”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인생을 욥이 살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요. 그런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나중에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욥을, 욥을 책망하실 때에, 그 욥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거예요.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은 어땠을까요? 마태복음 1장 19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요셉이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서 예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한 인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그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경건한 유대인이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사용되는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대체로 3번의 의미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고요. 여기서 잠언서에서 의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어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체로 악을 지으며 악의 길로 가려는 사람과는 반대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살려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완벽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는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 말씀이 진짜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이예요.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 말씀은 정말 가슴이 뛰는 말씀인데, 하나님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진짜입니까? 우리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여러 가지 환란과 아픔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이 던지고 싶은 질문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정말 구원해 주실 겁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 주실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인데요.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 망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고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해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지 멋대로 살고 악을 행하며 살고 속이면서 살아도 잘 먹고 잘 살고 아프지도 않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런데 정말 이 잠언서의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의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 거죠. 실감되지 않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 왜 안 구원해 줘요? 근데 왜 하나님 내 문제는 해결 안 해줘요? 근데 하나님 괴로워 죽겠는데, 왜 그냥 이 상태로 방치해둬요? 왜 응답을 안 해줘요?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에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이 큰 괴리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니엘의 새 친구들처럼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더라.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까 건져주신다고 믿었어요.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를 풀물불 가운데 던져 넣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건져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풀무불에 던졌는데, 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아, 순 가짜였구나. 뻥이었구나.” 하면서 낙망할 게 아니라, 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믿음을 변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은 의인을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 성도를 건져주시는 것이죠. 의인을 건져주신다고 하는 말은 우리 성도를 건져주신다고 하는 말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그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이며 보편적인 약속입니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약속을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틀에 가두어 놓고 하나의 법칙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어떠한 법칙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고, 둘에서 하나 빼면 하나고 그렇게 정답이 딱딱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까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연히 건져주셔야 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당연히 이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셔야만 된다고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우리가 그런 우리의 틀에 맞출 수가 없고, 하나님의 하나님을 그 틀에 가두어 둘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천편 일률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져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뜻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허락해 주실지는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래서 정말 우리가 기도한 대로 될지 기도한 대로는 정반대로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겠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건져주실 수도 있겠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실 때도 있는데, 그 뜻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앞에서 겸손하게 순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고,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자세이며,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머리로 이 자연의 이치조차도 제대로 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머리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그 계획과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오묘하신 섭리 앞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는 겁니다. 욥처럼 욥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이렇게 결국 고백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여기서 그는 누구예요? 하나님이 아시나니, 내가 가는 길을 내가 몰라요. 도대체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가서 이쪽으로 가서 이 길로 가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아오리라. 풀무를 통과하면서 나를 하나님께서 단련하시는 그 고통이 너무나도 크지만, 그러나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신 목적이기에,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목적이 아니라, 나를 순금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뜻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야 될 것이라고 믿을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잠언서의 말씀이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의인을 성도를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신다는 말이 거짓말이에요? 참말이에요? 안 이루어지는데도, 안 이루어지는 일이 있어도 참말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은 보편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봄이 되면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결국 열매가 맺힐 거라고 하는 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저도 옥상에 심었어요. 왜 심었을까요? 땅이 비록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으면 뭐가 날 거라고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심었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면 모든 씨가 다 나나요? 아니요.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수고하고 애썼으나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씨를 뿌리면 열매를 얻게 될 거라고 하는 말이 틀렸죠? 틀렸습니까? 열매가 안 맺혀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는다. 진리예요?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예요. 안 믿는 씨가 있어도 진리예요.

기도의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듣겠고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셔요. 그런데 안 들어주는 것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거짓말한 건가요? 아니요. 부모님의 마음과 같아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너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게 말해. 너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게 말해. 내가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줄게.” 그래요. “아빠, 나 자동차 하나만 사주세요.” “아니 그건 내가 능력이 안돼서 못 사주는데.”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가요? 아니요? 사랑의 말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걸어가다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만 같아요.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은 승승장구하는 이 황당한 세상을 살아가야 해요. 도대체 이런 황당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엉터리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세요. 믿을 수 있어요? 없어요?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데,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환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길로, 선하신 길로, 푸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데, 도중에 가는 길에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 앞에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50대 초반에 늦둥이를 하나 나신 분이 계신데요. 그분의 페이스북을 보면 그 늦둥이하고 얼마나 재밌게 지내는지 참 샘이 날 정도입니다. 근데 그 늦둥이 아들이 이번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코로나에 걸려서 아기가 괴로워하는 그 모습을 본 그분이 그 아이의 코를 코에 입을 대고 쭉쭉 빨아서 콧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빨아서 그렇게 몇 번 했더니, 이 아이가 다 낳은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기분 좋게 막 돌아다니고 있는 영상을 찍어서 올렸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기분 좋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적어 놓으면서, 그런데 덕분에 아빠는, 기저질환이 있는 아빠는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면서, 나는 이렇게 아픈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는 글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도들을 환난에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인생의 길 가운데 때로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무리 기도에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아무리 엎드려도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도, 내가 가는 길을 나는 모르지만 오직 그분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달련하신 후에는 순금 같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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