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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 이국진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오해가 역사상 많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말시오니즘(Marcionism)이라고 하는데, 말시온(Marcion)이란 사람이 주장하였다고 해서 그렇다. 하지만 터툴리안(Tertullianus)이 효과적으로 말시온에 대하여 반박한 것처럼,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친절을 베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레위기에서 추수의 법을 이렇게 기록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비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3:22).

구약의 율법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우리의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물론 나는 개같이 벌어야 한다는 우리 속담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다”는 말로 이해하지 않고, “체면을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도 좋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그렇다면, 이 속담은 성경적인 정신에 위배된다. 구약의 정신은 돈을 버는 과정에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승처럼 돈을 쓰기 위해선, 정승처럼 돈을 벌어야 한다.

빙점이라는 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남편의 월급이 적어서 늘 쪼들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그마한 가게를 차려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얼마나 친절하고 성실하게 손님들을 대했던지, 그 가게는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집에 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저 쪽 마을에 있는 가게가 장사가 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고 하고, 이쪽 가게도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미우라 아야꼬는 자신의 가게에서 취급하는 물품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물건은 옆 가게에 가면 있을 겁니다. 옆 가게로 가세요.” 미우라 아야꼬는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짬을 내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장사하는 시간을 줄이고 글을 쓰게 되어 빙점이란 유명한 소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964년 7월10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잡화점의 주부,깊은 밤 계속 글쓰기 1년”이란 제목으로 1천만 엔 현상금이 걸린 장편소설 부분에 한 평범한 주부의 “빙점”이 당선됨을 알렸다.

부를 축적한 이후에 그것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구약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지켰다고 할 수 없으며, 사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는 말씀을 온전히 지킨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돈을 버는 과정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종업원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거래처에게는 공정한 대우를 해주며, 갚아야 할 대금을 미루지 않고 갚아야 한다. 또한 손님들에게는 과하지 않은 적당한 가격을 받아야 한다. 종업원들에게는 인색하면서, 부당한 경쟁으로 경쟁기업을 무너뜨리고 성공한 후에, 소득 가운데 일부를 사회로 환원한다는 것은 한참 부족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라도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니, 그런 사람들이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정신은 정승같이 쓰는 것만으로 사랑을 온전히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의 정신은 정승같이 쓰기 위해서 돈을 버는 과정에서도 정승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크리스천 기업이라면, 기업의 이윤을 가지고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그 기업과 관련된 업체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고아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 오히려 자기 종업원들이나 손님들에게는 매정한 경우가 있다. 수재 의연금으로는 많은 돈을 기부할 줄 아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사용하는 일꾼들에게는 매정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돈을 사용할 때에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과정에서도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서 과연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 험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파이를 키워야 나누어 먹을 파이가 있을게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우리들의 머리에서 떠오른다. 그렇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업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나누어줄 파이가 작아질 수도 있다. 그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파이를 키우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이 된다면, 결코 파이를 나눌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한 목적 때문에 자신의 사업이 망해가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태인을 구출해 낼 수 있었다. 만일 더 많은 유태인을 구출하기 위해, 먼저 사업을 성공시켜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는 유태인을 아무도 구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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