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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5-49)

제3언: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3-27) +++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요 19:28-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을 때, 오늘 말씀해 보니까 제6시로부터 제9시까지, 그러니까 오늘날의 시간으로 하면 정오에서부터 3시까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그 시간까지, 약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한낮인데 밝게 빛나야 하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어야 되는 그 시간인데,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하게 어두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3시간 동안 칠흑 같은 그 어둠 속에 온 세상이 뒤덮이게 되었던 그런 신비한 현상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의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빛 되신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치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인데, 그 빛 되신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 결국 우리들이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그런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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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빛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였는데요. 그 거부한 것의 가장 결정적인 그 장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었던 것이고, 그렇게 빛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게 될 때, 우리가 시각적으로 볼 때에 정말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겠는데요. 바로 그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임한 것은 바로 지금 유대인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라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그런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그저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빛을 거부한 것이고, 진리를 거부한 것이고, 결국은 영적인 흑암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늘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비춰주시는 그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그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려주시는 그 생명의 빛을 거부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애써 외면하며, 애써 못 들은 척 하며, 마치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진리를 거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겠는데요.

늘 그러한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많이 발생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러한 일들이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심각한 죄악인 것이고, 우리가 어둠 가운데 걸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늘 주님의 진리의 빛 가운데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없이 사는 삶은 영적인 어둠 가운데 사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대로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했을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절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 낙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 무슨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이 순간에 반응하기를 원하시는가 늘 생각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네 번째로 하셨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절규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아람어로 외치셨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도 그 아람어로 그렇게 외치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고, 리라고 하는 것은 “나의”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 하게 되면 나의 하나님, “엘리” 나의 하나님. “라마” 어찌하여. “사박다니”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극심한 고통의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울부짖은 것일 겁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찾게 되고 엄마를 찾게 되고 아빠를 찾게 되는 때가 있다고 한다면, 가장 고통스러울 때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도 심하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심각한 고통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실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듯한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 지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해 주셨던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다고 하는 사실이 어쩌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 울부짖었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가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을 바라보게 될 때, 그럴 때 충격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울부짖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흔히 망각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하나님이시기도 하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신적인 속성을 다 가지고 계시고 계시지만,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이 아무런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을 그대로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 고통은 아무런 별것이 아닌 그런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달리실 때 “아, 이거 별거 아무것도 아니네.” “맞을 만하네. 견딜 만하네.”라고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금 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여유롭게 십자가 위에서 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다고 한다면 정말 견딜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그대로 당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부짖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아픔은 사실상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달리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지은 허물과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이라고 할 것인데요. 이 예수님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우리가 지었던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지을 때 잘못을 할 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일들을 쉽게 저지르곤 합니다. 우리는 그냥 깔깔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흠을 보고 욕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기도 하고, 따뜻한 사랑의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그냥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멸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정도의 것이야 그냥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감사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고, 나랑 스타일이 다르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생각한다고 생긴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차별하며 미워하는 행위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리고 슬쩍슬쩍 거짓말을 하며 슬쩍슬쩍 남의 것을 훔치는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그것이 죄가 아니고 그냥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그 죄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생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할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죄악이었던 것인가? 이것이 그냥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죽음의 고통의 본질은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서 사실 더 심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입니다. 지금 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의 그 관계가 단절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모습을 보시면 늘 주님과 소통하면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내가 기도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이 세상 공생의 3년 동안에 혹은 4년 동안에 행동하실 때 늘 주님과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이 행동하셨던 모습들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행동하면서 단 한시도 1분 1초도 하나님과의 뜻에서부터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늘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 또 변화산상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되실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 아들이니, 너희는 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는데,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 그 순간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큰 고통,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 사실 이것은 우리가 당해야 될 그러한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위에서 외로이 하나님의 그 외면 가운데 죽어가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가르쳐 주실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대상이 무엇이냐 하면 바윗덩어리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덩어리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내가 기도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도 전혀 우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돌덩어리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사악한 재판관과 같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죠. 과부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재판관 앞에 나가서 간청을 합니다. 재판장님 재판장님 네 억울한 사정 좀 들어주시고 해결해 달라고 그렇게 간청하는데, 이 재판관은 그 과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과부의 간청을 들으면서도 콧방귀도 끼지 않습니다.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관심이 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재판관은 무시하면서 전혀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겨우 그를 움직인 것은 자꾸 찾아가서 귀찮게 하고 또 귀찮게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이 여자를 내쫓기 위해서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겨우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귀찮게 여기시고 정말 듣기 싫어하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사 귀를 기울이시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귀 기울이시며 정말 우리에게 가장 무엇이 좋은 것인가 우리를보다 더 잘 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인데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주실 수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아들 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아들 되심이 단절되고, 관계가 끊어지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의 울부짖음이 하나님 앞에 들려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이만큼 예물을 드렸으니까 이만큼 기도 들어주세요. 이만큼 착하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의 보상을 주세요.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잘했으니까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 주세요라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 가운데 늘 붙이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대신에 우리의 형벌을 쥐고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단절됨으로 말미암아, 울부짖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 그 엄청난 고난과 단절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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