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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롬 2:17-29)

하나님의 법과 본성 (롬 2:12-16) +++ 성도 됨의 유익 (롬 3:1-8)

한동안 성탄절이나 12월을 맞이해서 절기와 관련된 메시지들을 우리가 살펴보았었는데요. 이제 다시 로마서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게 됐습니다. 오늘 래오가 아주 예쁜 목소리로 귀여운 모습으로 성경 말씀을 읽어줬는데요. 로마서 2장 17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오늘 살펴볼 차례입니다.

항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 하나만 뚝 떼어가지고 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안 보는 것보다야 낫지만, 성경 말씀을 어느 한 구절만 뽑아내서, 그 말씀만 문맥과 상관없이 어느 한 구절만 뽑아내게 되면, 그 말씀을 오해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를 하는 그 과정 가운데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면서 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떤 표현 하나, 어떠한 단어 하나에 열을 받기도 하고 화를 내게 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화를 할 때라도, 이 말을 한다고 하면,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야 하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해주는구나! 그 맥락 안에서 그 말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그 전체적인 그 맥락 속에서 한 표현 한 글자 하나하나를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쩌면 불필요한 갈등들을 많이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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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들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실패하는 일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인생을 우리가 묵상하게 될 때, 우리들의 인생을 생각하게 될 때,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그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 하나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큰 그림을 보지 않고,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것만, 지금 어려움 당하고 있는 것만, 지금 실패 한 번만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가를 봐야 되는 것이죠.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전체적인 맥락이 무엇인가? 그 맥락을 놓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부분의 말씀들을 오해할 가능성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간만에 로마서 2장 17절에서부터 29절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로마서라고 하는 전체의 큰 서신 가운데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이 말이 나온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요약을 해봤습니다.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로마서 1장과 2장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장 1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는 인사말이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복음의 사도가 된 이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내가 편지를 쓴다라고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 바울 사도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8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로마를 방문하여 여러분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다. 복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고 싶은데, 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복음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8절에서부터 17절까지에 있습니다.

18절에서부터는 내가 복음을 나누고 싶은데, 이 복음이 왜 우리들에게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우리는 복음이 필요한가?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은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진노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한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18절에서부터 2장 마지막절까지의 말씀인데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에 있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몰랐던 사람들도 진노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도 진노 아래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18절에서부터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셔서,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 내용이 24절에서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이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면 벌을 내려주시는 그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해서 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율법이 없는 사람이든, 모두가 다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심판할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양심이라고 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이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 양심의 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진노를 당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12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고요. 오늘 우리가 읽은 17절서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 그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대로 살지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과정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가 되십니까? 네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반응해 주셔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모든 사람들이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고 다 실패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고 한다면,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언약의 백성이요. 할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구원을 보장받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목적을 이루었다는 얘기입니까?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죠?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여러분 나는 완성 단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나는 아직 잡은 것도 아니고, 아직 이룬 것도 아니고, 아직 부족한 사람이고, 나는 저 표대를 향해서 목적을 향해서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야말로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세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다윗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브라함도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빼고, 당연히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이 어쩌면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의 고백이 뭐냐면 나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직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놀라운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냐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얻는다든가, 우리가 어떤 직분을 얻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의 얻어야 할 최종적인 목표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단계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어디일까요? 처음 교회에 나왔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가지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서리 집사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또 서리 집사로서 어느 정도 사역하다 보면, 몇 년이 지나면, 그러면 권사가 되기도 하고 안수 집사가 되기도 하고 또 더 지나게 되면 장로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렇게 되면, 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루었구나. 내가 이제 권사가 됐고, 내가 장로가 됐으니까, 내가 올라갈 수 있는 만큼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분은 장로가 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 해가지고, 은퇴하신 이후에 목사가 되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쩌면 목사라고 하는 거, 이게 어쩌면 가장 최고의 신앙의 단계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부흥회를 했을 때는,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전에는 부흥회를 하거나 수련회를 하거나, 여러 가지 중고등부 수양회를 간다든지 집회를 간다든지 하게 되면, 강사 목사님께서 오셔가지고, 막 집회를 한 다음에 마지막 날이 되면 헌신 기도를 막 시켰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헌신 기도를 막 시키면서, 그때 강사 목사님이 했던 말이 뭐냐면,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종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손 드십시오. 그랬어요. 기억나십니까? 그랬어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여자분들 가운데 사모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우리 제 아내는 사모가 되겠다고 하는 거야 안 일어섰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그때 ccc라고 하는 단체에서 했던 아주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찾았네?라고 하는 그런 집회가 있었는데요.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장충체육관에 몰려 들어가지고, 그 장충체육관 정말 큰 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고등부 학생들이 다 그 자리에 앉아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그때 강사 목사님이 누구셨냐면 김준곤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김준곤 목사님께서 그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사야서의 말씀을 했던 것 같아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다고 하는 그 메시지를 전한 다음에 김중곤 목사님께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선교사가 되실 분이 계십니까? 그 자리에 일어서십시오. 그래 가지고 제가 벌떡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이 뜨거웠어요. 내가 주의 종이 돼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헌신했는데, 그때 제 어렸을 때 나이에, 그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가 되는 것, 선교사가 되는 것, 주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그런 목적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고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요. 제가 26세, 만 26세 아주 새파란 나이에 목사를 목사 안수를 받게 됐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저는 좀 일찍 받았는데요. 아직 새파란 그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자, 우리 교회에서 계셨던 아주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께서 제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제게 존댓말을 할 때, 제가 엄청나게 황송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생각이 무엇이냐면 목사라고 하는 것이 가장 높은 신앙의 단계인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정말 그런가요? 내가 목사만 되면, 내가 권사가 되고, 내가 장로가 되면,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간 것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빌립보서 3장의 말씀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다.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이미 사도라고 하는 반열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높은 위치에, 신앙의 단계 가운데 올라간 것처럼 생각이 됐는데, 그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도다. 내가 이래봬도 사도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직 잡지 못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되어도, 만일 그 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을 때,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한 사람들이, 어쩌면 70인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70인의 제자들보다도 더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누가 있었냐면 열두 제자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로 뽑히게 된다고 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겠습니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런데 그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있었죠? 가롯 유다가 있는 거에요. 열두 제자면 뭐해요?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버린 배신자가 12 제자 가운데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베드로는 12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더 이너서클(inner circle)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세 명을 더 사랑하시고 더 붙들어주셨는데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늘 더 안에서 활동하게끔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쩌면 제자들 중에서 수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랬어요.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가장 이너서클(inner circle)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예를 우리가 성경에서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가 있겠는데요. 제사장이 되는 건 얼마나 거룩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제사장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면,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그런 예를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저 사람은 차라리 장로가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하는 그런 비난을 듣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무엇이 중요한가요? 뭣이 중한디? 뭐가 중요해요?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중요한 거에요.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임직 선거를 하면서 피택 장로가 되고, 피 집사가 되고 피택 권사로 선정이 되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 그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괴로워합니다. 나를 선택해 주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충분히 고통스러워할 만한 일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선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괴로워해야 될 일이 뭐예요? 내가 선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괴로워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벗어나고 있는 거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가슴 아파하고 더 슬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을 애통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직분을 가지느냐? 내가 어떠한 신분을 갖는가? 내가 어떤 위치에 올라가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2장 17절에서부터 29절의 말씀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다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들인데, 저 블레셋 사람들 저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저 이방인들, 저 할례를 받지 못한, 저 이방인들 하면서 비난하고, 나는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준 그 모세의 율법을 우리가 받았는데, 저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도 모르는 저런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했던 파울 사도의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로마서 2장 21절에서부터 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그 사실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표가 아닌 것이고,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이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옛날 세레 요한이 했던 메시지와 아주 똑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외쳤던 내용이 마태복음 3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계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 했습니다. 우리가 할례를 받아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고 하는 게 자랑거리가 아닌 거죠.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닌 겁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법에 따라 볼 때, 그들이 악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알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아냥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잘하세요 하는 그런 비아냥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지고 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가는 가운데, 저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분노하고 싶을 때 저희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탐욕스러운 마음이 들 때 저희들의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 들 때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오셔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그 존재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2년 한 해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주의 십자가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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