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둔한 자 (출 6:10-13)

+++ 명령하신 대로 (출 7:1-7)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쓰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대답을 할 수가 있겠는데요. 성경 말씀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쓴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면, 놀라운 결과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의심하는 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지만, 예수님을 거부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아니한 마을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기를 금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믿고 은혜의 바닷속으로 뛰어든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기적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들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찰싹거리는 그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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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고 성경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은 금 그릇과 음 그릇만 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나무 그릇 질그릇이라고 할지라도,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경우에 따라서 쓰신다는 겁니다. 금 그릇과 은그릇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그릇을 쓰시는가?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그릇을 쓰신다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잘 준비시키고, 깨끗한 그릇으로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당연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맞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쓰고,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쓰시니까, 내가 좀 더 믿음이 있어야 되겠다. 내가 좀 준비되어야 되겠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가 준비되고 믿음을 더욱더 잘 가져서, 하나님의 그 손에 붙들리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나도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쓰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들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그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고 하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대단한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을 만나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담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잘 준비되어 있는 것 같고, 정말 깨끗한 그릇이 되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 믿음이 없어요. 조그만 어려운 일을 만나도 마음 가운데 불안한 마음이 들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고,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닌가? 조그만 힘든 일을 만나도,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려버리면서, 불안해지는 내 마음을 보면서, “나는 믿음이 없구나.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을 것 같고, 나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고, 준비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겠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세계 만물을 다스리는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고, “너는 믿음이 없구나” 하면서, 불합격 딱지를 붙여버리고 떠나버리시는 하나님이실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구나.” 하면서, 우리들에게 불합격 딱지를 붙여버리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시는 하나님이신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무서운 일을 만나면,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담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무서운 일을 만나게 되면 불안해 죽겠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정말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정말 조그마한 시험과 어려움을 만나도, 우리들의 믿음이 순식간에 다 없어져버리고,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너는 무슨 믿음이 빵점이구나” 하면서 책망해 버리고, 그냥 문을 닫아버리시는 주님이 아니시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의 눈으로 보신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에 있는 바닥 한가운데서 불안에 빠졌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이 일게 되었을 때,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작은 어선, 그 어선은 그 풍랑에 의해서 좌초될 수밖에 없고, 어쩌면 그것이 배가 뒤집혀서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아주 심각한 위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때 보여주어야 할 당연한 반응이 무엇일까요? “아, 괜찮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게 주시니까, 아무 문제없어.” 하면서 담대하는 것이 당연할까요? 그 순간에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앞에 홍해 바다가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면 “아무 문제가 없어. 괜찮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그 앞에서는 다 무서워서 벌벌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겁니다.

제자들은 그 상황 가운데서,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주님 이렇게 주무시고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돌보지 않으십니까?” 하면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으로 읽으니까, 문자 글자만 보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톤으로 말씀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문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 한국 성도님들은 대부분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주님께서 책망하신 걸로 이해를 해요. “이 바보들아, 어찌해서 무서워하느냐? 이런 상황에 좀 담대할 수 없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걸로 그렇게만 이해를 하시는데, 사실은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의 자녀가, 여러분들의 딸, 여러분들의 아들이 번개가 펑펑 치는 그 무서운 상황 가운데서, “엄마, 무서워.”하고 달려들면, 여러분이라고 하면 그 자녀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이 바보야. 이게 뭐가 무서워?”하고 책망하시겠습니까? “뭐가 무섭다고 그래? 엄마가 여기 있잖아.”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들이 무서워했구나.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 그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감싸고 포용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할 거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그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 자식이 죽어간다고 한다면, 그 앞에서 “괜찮아” 하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할지 몰라,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믿음이 있는 것 같고 나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데 사실 그게 우리들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주셔서, 그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그런 엄청난 사명을 맡기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모세라고 한다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오. 정말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낸 정말 민족의 영웅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라고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주님 알겠습니다. 하나님 이름 믿고 내가 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아닙니다. 이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말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어떻게 내 말을 듣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어떻게 갑니까? 저는 말이 둔한 사람입니다. 입이 둔한 사람이고,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그 앞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저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 왕 앞에 가서 꺼내달라고 보내달라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볼 때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완벽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런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가 완벽하게 믿음이 있고, 완벽하게 깨끗하고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 마치 부모가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더러운 것을 씻겨주시고, 그리고 그 아이를 온전하게 만들고 그를 돌봐주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단점이 많고 또한 믿음이 없고 또한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해서 도망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를 다시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바꾸어 주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그런 자도 주님께서는 사용해 주셨고,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이 없는 자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아브라함이 완전하게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을 믿지 못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거예요. 그 약속을 믿지 못해서, 내 종 엘리에셀이 내 아들이 되겠다고, 양자가 되겠다고 말을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하겠다. 너희 가정을 지켜 보호해 주겠다”라고 하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해서, 애굽에 가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들을 한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네가 믿음이었구나” 하면서 물리쳐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품으시고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 가셨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을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의 위대한 일들만을 바라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들과 똑같이 믿음이 없고, 똑같이 부족하고, 똑같이 허물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믿음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믿음의 훈련을 해서 더 깊은 믿음이 있어야 되겠고, 우리를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룩한 그릇으로 우리를 바꾸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이 세상의 방법이 다른 것은, 거짓 종교와 참 종교가 다른 것은 이 세상의 거짓 종교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말하기를, 자격이 없으면 “넌 불합격”이라고 말하고 냉정하게 내쳐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들, 우리처럼 믿음이 부족해서 늘 불안에 떨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족해도 사랑하신다고 말씀해 주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뛰어난 사람 능력이 많은 사람 정말 뛰어난 자들만을 선착순 시켜서 일등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자도 사용하시는 것,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부터 29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은 이세의 아들들 가운데서 다윗이 가장 뛰어나고 똑똑하고 가장 출중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펙으로 따지자고 한다면, 장자 엘리압이 훨씬 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훌륭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모세가 우리와 정말 다른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의심이 많고, 우리와 똑같이 불안해하고, 우리와 똑같이 믿음이 없는 그 이 모세를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면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사람들 유태인들이야말로 정말 빼어난 민족이고, 다른 그 어떤 민족보다도 정말 대단한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대인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합니다마는, 사실은 유대인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유대인들도 자기 나라 말을 잊어버린 민족이었고, 유대인들도 죄를 짓는 민족이었고, 우리와 똑같이 죄인이고, 우리와 똑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신명기 7장 7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적으니라.” 여기서 지금 수요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숫자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것을 대입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이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이 지혜가 뛰어나서, 아이큐가 뛰어나서, 그들이 무언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순간만 해도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가 완벽하게 어느 경지에 올라서 도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는 그 어떠한 바로 앞에 선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고, 이제는 그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지혜롭게 잘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용기와 지혜와 믿음과 그 모든 것들을 두루두루 갖춘 욕맹을 갖추고, 무술을 갖추고,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우리와 똑같은 그리고 우리처럼 나약한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사람, 완전한 사람을 찾기를 원하고, 전문가를 찾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프게 되면 우리는 의사를 찾아갑니다. 훌륭한 대학에서 의학 박사를 받고, 그리고 그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는, 그런 의사에게 찾아가 내 질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지, 돌팔이 의사에게 가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겠죠. 만일 우리 아이들의 실력이 떨어진다고 한다면 학업 능력이 뒤처진다고 한다면, 족집게 학원 강사에게 데리고 갑니다. 전문가이고 우리 아이들을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바꾸어 줄 수 있는, 그런 검증이 된 그런 전문가에게 맡기면, 그러면 우리 아이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어떤 시대냐? 전문가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 전문가에게 맡겨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완벽하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도 어떤 남편을 기대하고 있는가? 완벽한 남편을 기대하는 것이죠. 아내는 어떤 아내를 기대하는가? 완벽한 아내를 기대하는 겁니다. 교회도 어떤 교회를 기대하는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교회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잘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전문가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폴 트립(Paul Tripp)이라고 하는 상담 학자가 있는데요. 그 사람이 쓴 <치유와 회복의 동반자>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 폴 트립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했냐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의 성화를,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잘 훈련된 유급 전문가의 손에 맡기셨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성경적인 모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전문가에게 맡겨서 전문가에게 해결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트렌드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을 어느 가정에 주시는가? 어느 가정에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게 하시는가? 그것은 영적으로 부모님이 완벽해서, 모든 믿음의 모범을 보이고, 완벽한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그런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정말 인내하고 정말 인격이 뛰어난 그런 가정에 아이들을 태어나도록 만들고, 또 완전히 오은영 박사처럼 모든 문제들이 일어났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잘 대처할 수 있는, 유아교육 전문가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다 맡기신 것이 아니라, 실수도 많고 부족하고 나약한 초보 아빠 초보 엄마의 가정에 아이들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소리 질러 버리고, 분에 못 이겨서 아이들 앞에서 정말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런 엉터리의 엄마 아빠들 밑에 꼬마 아이가 자랄 수 있게 만들어주신 거예요.

전문가의 손에서가 아니라, 북한에서 옛날에 했었던 것처럼, 탁아소에 아이들을 다 맡겨버리고, 그래서 전문가들이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설픈 아빠, 어설픈 엄마의 손에서 때로는 신경질도 부리고 인내하지 못하는 그런 엉터리 엄마 아빠들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아서, 요즘 엄청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 제대로 자격이 안 되는 부모들에 의해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있을 그런 상황까지도 벌어지게 되는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만들어주셨는가? 영적인 성숙은 어느 상황 가운데서 벌어지냐면,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아이들도 영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기르면서 엄마와 아빠도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한 가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가 있어서, 그래서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총각 아무것도 모르는 어설픈 처녀가 만나서 완전히 우둥퉁 솟아오르는 그 돌처럼, 만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것에 의해서 부딪히고 저것에 의해서 부딪히고, 붙기만 하면 계속해서 다투고 싸우고, 여러 가지 그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점점 영적인 훈련이 되면서, 인내하기 시작하고 하면서, 점점점점 다듬어져서 결국 보들보들한 조약돌처럼 빚어지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한 남자를 찾아야만 행복할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완벽한 한 여성을 만들어야만 그 사람 사람과 결혼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고 하면서 빚어지게 만들어 주신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가? 이 교회를 찾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만날 수 있는 성도들은 정말 지구 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인격적으로 뛰어나고 정말 수련이 잘 돼 있고, 그래서 마음이 넓은 그리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나와 똑같은 죄인을 만나는 거예요. 나처럼 화 잘 내고, 나처럼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아놓으셨어요. 아니 완벽한 사람을 모은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교회는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태능선수촌에 모여 있는 사람들처럼 최상급 선수들만을 모아놓은 그런 태능선수촌과 같은 것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어떤 곳인가? 수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는 그런 종합병원과 같은 곳이에요. 어떤 사람은 인격이 잘못돼 있고, 어떤 사람은 성질이 더럽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인내하지 못하고, 그런 옹졸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훈련시키시고 계시는데, 내가 만일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하면,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시험거리가 아니라 영적 성숙을 위한 계기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면서, 이러한 사람들과 만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더 겸손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지, 인내할 수 있을지를 배워서 그래서 영적으로 함께 성숙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처럼 불안해하고 우리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십니다. 입이 둔하여 말을 제대로 잘 못하는 그런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리더로서 불합격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볼 때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볼 때 믿을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계산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도 사랑하시고,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움직이실 때 모세와 같은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정말 믿음이 대단한 것 같고, 저 사람은 정말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보일까요? 그들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단해 보이는, 빙산의 일각만 보기 때문에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가 없어요. 흔들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나가야 하는 것이고, “나의 연약함을 좀 도와주시옵소서”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낮은 땅 위에 오신 것이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시는 겁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밖에서 놀다가 흙탕물에 넘어지면, 그걸 보고 “이 멍청한 놈아. 이 바보 같은 놈아. 왜 거기서 넘어졌느냐?”라고 책망해 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고 한다면 달려가서, 그 아이를 끌어안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그 더러운 그 옷을 다 씻겨주고 회복시키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늘 넘어지고 늘 이기적이고 늘 탐욕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날마다 날마다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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