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기름을 빌릴 수 없는 상황

– 이국진

신랑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을 때, 들러리들은 모두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졸다가 깨어난 이들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름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집안에서 사용하는 작은 등이 아니라 횃불을 밝힐 수 있는 등을 들고 신랑의 집까지 가야 했을 것인데, 횃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15분마다 감람유를 공급해야 했다. 1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아예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2 하지만 이들이 준비했던 기름은 신랑이 오는 것이 한없이 늦어질 때 곧 바닥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정도로 늦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상황까지는 미처 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랑이 도착했다는 전령의 소리에 잠이 깨어 이제 신랑의 집으로 향하는 행렬을 시작할 즈음에 이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기름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자신들이 쓰기에도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 급하게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혼인행렬에서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뒤늦게 찾아갔지만 이미 굳게 닫힌 신랑 집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그들이 들어야 했던 말이다.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는 선언은 스승이 학생을 축출할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리석었던 들러리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해서 혼인행렬에 동참할 수 없었을까?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혼인잔치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100%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상식적인 생각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등을 의지해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더 나아가 늦게 왔다고 해서 혼인잔치에 전혀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20세기 초엽의 영국 학자 외스터리는 그랬다고 단언한다. 3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름이 부족하니까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같은 동료이자 친구들인 다른 들러리들이 실제로 거절했을까?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실제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이 전혀 발생할 리 없었을 것이다.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들이라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4 행진을 위해서는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쯤은 그 누가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아는 상식에 해당한다. 그래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들러리를 생각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름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5명의 들러리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가 찼을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들러리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여기에 비유가 가지는 강력한 파워가 있다. 비유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함으로써 청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기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들러리들은 결국 기름을 구하러 다니다가 신랑의 행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혼인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결론을 지을 때, 청중들은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그건 어리석은 들러리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가 사실은 영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자기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채 말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어리석은 들러리들을 비난하고 있는 청중들을 향해서 일격을 가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들은 심판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기름을 준비하는 들러리 입장에 있으며, 지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메시지이다.

슬기로운 들러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을 나누어줄 수 없었다. 이러한 설정은 믿음은 오직 개인적인 것이며, 타인이 자신을 위해서 대신할 수 없다는 원리(겔 18:20)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비유의 또 다른 유사점이다.

기름을 준비할 시간은 아직 신랑이 오기 전까지뿐이다. 만일 그때까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는 아무리 기름을 준비할 기회가 없다. 이것이 영적인 교훈과 일치하는 유사점이다. 버스가 떠난 뒤에는 손을 들어보았자 소용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두 종류로 분류하신다. 즉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가 5명이었고 어리석은 처녀가 5명이었다고 하신 것은 마지막 날에 정확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의 숫자가 반반씩이 될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는 자들의 숫자가 오히려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따라서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교훈을 무시하고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정확하게 반절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비유를 오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약삭빨라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부러워하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위하여 잘 준비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부자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지옥불에 떨어진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정말 고통을 당하며 살았던 거지 나사로보다 불행한 사람이다(눅 16:19-31). 이 세상에서 많은 소득을 가지고 먹을 것을 쌓아두고 살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하다(눅 12:16-21).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 세상에서 어리숙해 보이고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마지막을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비유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했는가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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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Joachim Jeremias, “LAMPADES-Mt. 25.1, 3f” ZNW 56 (1965), 198.[]
  2. Contra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2), 176.[]
  3. W. O. E. Oesterley, The Gospel Parables In The Light of Their Jewish Background (New York, Macmillan, 1936), 315.[]
  4. Craig L.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VP, 1990),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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