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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관

– 이국진

이 비유에서 유사점(tertium comparationis)을 몇 개 찾을 수 있다. 첫째,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다. 재판관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과부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재판관에게 나아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재판관을 닮았다. 둘째, 그 재판관은 과부의 간청을 듣지 않는데, 어떤 점에서 하나님도 그런 재판관을 닮았다. 우리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기 보다는 전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하나님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종종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면서 한탄하곤 했다(사 40:27). 욥이 느꼈던 답답함(욥 19:7; 24:12; 30:20)은 바로 과부가 느꼈던 답답함을 닮았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 재판관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1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하나님의 모습일 뿐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얼마 동안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이 재판관은 당시 로마 정부가 임명한 지역재판관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지역재판관들을 세리처럼 경멸하기도 했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 재판관이 공의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재판관은 과부가 번거롭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귀찮아서 하는 수 없이 과부의 간청을 들어준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전혀 상달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재판관과 하나님의 다른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듣기 귀찮아서 그 기도를 중단케 할 목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하는 수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전혀 그 불의한 재판관을 닮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비되고 있는(contrasted) 것이며, 이점이 바로 대조점(tertium contrarietati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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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James A. Metzger, “God as F(r)iend? Reading Luke 11:5-13 & 18:1-8 with a Hermeneutic of Suffering,” Horizons in Biblical Theology 32 (2010), 48-49.[]
  2. Alfred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New York: Longmans, 1907), vol. 2.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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