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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부탁(삼상 12:19)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폭우가 치고 천둥이 내리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들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경고하시곤 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간청하였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12:19). 이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면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들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은 후에 사무엘에게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한 것이 특이합니다.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면, 자신들이 직접 하나님 앞에 엎드려 크게 뉘우치고 자복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이상하게도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이 아닌 “사무엘의 하나님”으로 불렀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기보다는 사무엘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에는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만일 다가간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cf. 출 19:21).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죄인이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中保, mediate)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허물이 많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고, 따라서 사무엘에게 부탁하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히 10:11-12)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장막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우리가 구약만 읽고 구약에 따라서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방식대로 우리가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약의 관점으로 구약을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누가 기도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들으시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초신자보다 더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영험한 기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의 기도보다는 그의 기도가 더 능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성경에는 목사나 장로나 권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라고 되어 있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한 것(약 5:16)은 평신도보다는 좀 더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성직자의 기도가 더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죄를 품은 채 기도하는 것을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cf. 사 1:15; 59:1-3),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말은 그러니까 목회자에게 기도를 부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삶을 알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은 누가 기도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들으시는가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시대에는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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