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사울의 용서(삼상 11:12-13)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울이 전쟁에서 이김으로 사울이 왕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은 입증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11:12). 사울 왕을 인정하지 않고 비아냥거렸던 불량배들을 처단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어쩌면 불량배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종자들일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워나가는데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도 있는 암적인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 왕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이번 기회에 불량배들을 숙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이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11:13). 이 말은 오늘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쁜 날이니 오늘은 말고 다른 날에 죽이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결코 그들을 죽일 수 없으며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구원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기쁜 날이기 때문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전쟁의 승리는 사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주도한 전쟁이 승리하여 자신이 전쟁의 공로를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울이 군사들을 모았고(11:6-8), 사울이 작전을 짜서 군사들을 3대로 나누어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11:11). 하지만 사울은 승전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군사들을 불러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수많은 병사들이 모집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여 나오게 만드셨기 때문이었습니다(11:7). 사울의 리더십이 훌륭했기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없습니다. 하지만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하에서만 떨어질 수 있다면, 전쟁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알았고, 전쟁의 승리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표현 속에서 용서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울이 전쟁의 승리는 사울 자신이 이룬 것이며, 스스로 왕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했다면 사울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불량배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왕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거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불량배들의 비아냥거림은 사울을 화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그대로 보게 만드는 재료였을 뿐입니다. 사울은 그들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뿐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불량배들을 향해 원수를 갚고 보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만일 용서가 가진 자 또는 힘 있는 자가 아량으로써 베푸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용서는 자신이 부족한 자임을 깨달을 때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의 비유에서(마 18:23-35), 그 종은 100데나리온의 빚진 동료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100데나리온을 빌려준 채권자라는 사실만을 생각했습니다. 용서는 100데나리온을 빌려준 채권자라는 인식에서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내가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자라는 인식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공로가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공로였다고 생각했다면, 보란 듯이 불량배들을 처단하였을 것입니다. 용서했더라도 그 용서는 제대로 된 용서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발견해야 하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그때에 우리는 용서가 가능합니다.

이전 글 읽기 – 야베스를 구원한 사울(삼상 11:6-11)

다음 글 읽기 –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15)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