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2.1 더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의 비유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하라

– 이국진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13)

2.1.1 떡과 생선과 알

같은 내용의 비유인데, 누가복음의 표현과 마태복음의 표현이 각각 약간씩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아들이 떡이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아들이 생선과 알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도 각각 마태복음에서는 돌이나 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뱀과 전갈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는 같은 교훈을 말하는 같은 비유이다.

두 복음서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비유를 수도 없이 많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비유의 공식은 아들이 무엇(A)을 요구할 때, 아버지는 그 무엇(A)보다 나쁜 다른 것(B)을 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바르부트(barbut)라고 하는 생선이 있는데 마치 장어처럼 생긴 생선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생선은 유대법에 따르면 부정한 생선이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 생선을 잡아도 바로 바다에 던져버리곤 했다. 예수님의 비유는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할 때에 아버지가 그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생선인 바르부트를 주겠는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1 또한 전갈은 둥글게 몸을 감고 있으면 알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2 그래서 아들이 알을 달라고 할 때 전갈을 주겠는가라고 예수님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라고 던지는 이 질문은 강한 부정의 대답이 기대되는 질문이다. 3

비슷해 보이지만 가치의 차이가 확연히 들어나는 두 대상이라면 이러한 공식에 얼마든지 넣어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햄버거를 사달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설마 돌멩이를 주겠는가?” “딸이 예쁜 머리핀을 사달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생선가시를 던져주겠는가?” 등등으로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문화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A의 가치보다 B의 가치가 더 높게 여겨지더라도 큰 문제가 안 된다. 예를 들어 뱀이 최고의 보양식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에서는 생선보다 뱀이 더 비싸고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본문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할 때 나쁜 것을 주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아버지는 아들이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이 구할 때 더 좋은 것을 주려 한다. 인간이 악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려 한다면,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더욱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러한 논법은 유대인들의 경중법(輕重法, qal wahomer)을 사용한 것이다. 경중법이란 작고 하찮은 것에서 진리라면 그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에서는 얼마나 더 진리이겠는가 하는 식의 설득방법이다. 악한 인간들도 자식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으로 제공하려고 한다면, 선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지 않겠는가라는 논법이 깔려 있다.

여기서 인간 아버지를 “악한”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대적자들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도 아니고, 4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5 모든 인간이 다 악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표현은 이 세상에서 악한 부류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조폭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점과 선하신 하나님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의 주소: http://iwbs.org/?p=164

목차로 돌아가기

다음 글 읽기 – 2.1.2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이전 글 읽기 – 1.1.8 비유의 분류

Loading

--[註]---------------------------
  1. 케네스 E.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이레서원, 2017), 236; Arnold J.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A Commentary (Grand Rapids/ Cambridge: Eerdmans, 2000), 239.[]
  2.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235;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A Commentary, 239.[]
  3.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206-207;[]
  4.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240-241.[]
  5.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Garden City: Doubleday, 1985), 915.[]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