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자연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저절로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표현해주는 표현이 바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다(마 10:29).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재료는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우리들의 주관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것보다, 객관적이고 확실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묻어 있게 마련이고, 그러한 일들이 어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지를 묵상해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옆을 내가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옆으로 지나가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구나.” 그런 묵상이 없었던 사람들이 제사장이고 레위인이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자의 옆을 지나가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게 하셨는지 묻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병이 낫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낫게하여 주시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질문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러는 과정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깨달았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8)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해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정말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종종 이런 표현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 사도는 병이 낫지 않는 현상을 보면서, 그것은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문제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에 대한 해석이 종종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욥의 친구들의 해석이었다.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욥을 위로하러 왔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필시 네가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죄를 생각해내고 회개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었다. 첫째,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실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욥이 고난을 당한다면 분명히 어떤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현 상황에 대한 해석은 신중해야 한다. 잘못된 해석은 해석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이 잘못된 해석인가? 나 자신의 회개와 각성으로 이끄는 해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목적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런 식의 해석은 바로 욥의 세 친구들이 했던 해석이고, 바리새인들이 주변의 세리와 창기들을 향해서, 그리고 암하아레츠(평민)들을 향해서 했던 해석이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거나 빌라도가 사람들을 죽였을 때 유대인들이 했던 해석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는 동성애를 저지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혼전 성관계 같은 성적인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이다. 동성애나 성적인 문란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심판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럴듯해 보였던 욥의 친구들의 해석이 잘못된 것처럼 이러한 해석도 정당하지 못하다.
이렇게 말해도 불신자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조롱거리만 된다. 예를 들어, 어빈 벡스터 주니어 목사는 혼전 성관계 때문에 코로나 걸린다고 비난했는데, 결국 자신이 코로나 걸려서 작년 11월 3일에 죽었다.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다가 본인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바른 해석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해석이다. 요나의 경우가 그랬다. 요나는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는 배에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요셉의 형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지금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그들이 예전에 요셉에게 했던 잘못에 대한 책망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비난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를 물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하셨다.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회개를 생각해내야 한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자족하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성경의 가르침은 늘 항상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이다(살전 5:16-18).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하며 자족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딤전 6:6-8). 그런데 우리는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고, 탐욕을 부리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을 빼앗기면서, 사실 그 동안 우리가 누리며 살았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코로나19가 감사하지 않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았던 우리의 삶을 회개하라는 사인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 옛날 다윗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코로나19로 인하여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예배를 드려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흩어버리신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그들이 가져오는 무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지 않고 그저 종교적 행위로 때우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셨던 말씀이다. 어쩌면 이렇게 예배를 중단시키시는 것은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예배로 모였고, 자신의 세속적 유익을 위해서 예배를 이용하기도 했기 때문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그 동안 우리가 우리들의 이웃을 돌보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코로나19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 가운데 하나는 인류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 한 사람만 잘 지내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이 우리들의 건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코로나19를 통해 깨닫는다. 우리의 나라만 잘 되면 괜찮은 게 아니라, 세계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깨우치시기 위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만나는 상황을 보면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사건을 통해서 각각 다른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나안 민족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였다. 똑같은 사건도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이다.
성경 말씀을 잘 읽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축복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소아시아에서 전파하는 것이 막히는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행 16:6-10).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것은 아주 큰 기쁨이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잘못된 해석은 파멸로 이끌게 되기도 한다. 사울 왕은 상황을 해석할 때 이기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욕심과 시기와 질투 속에서 해석했다. 결국 그러한 잘못된 해석은 사울 왕을 파멸로 이끌었다. 사실 영적인 성숙은 내가 만난 상황을 어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