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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우리의 관심사

– 이국진

한 동안 신약학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셨던 비유의 원형과 그 원형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예를 들어,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의 비유들은 각기 그의 생애 안에 특정한 역사적 자리를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되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예수는 이런 저런 특정한 시간에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의 말은 청중에게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 물음은 —가능한 한— 예수의 비유들의 원래 의미에, 예수 자신의 소리(ipsissima vox)에 돌아가기 위해, 제기되어야만 한다.” 1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와 다르다는 전제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들은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복음서의 저자가 처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아 각색되고 채색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 제시된 형태의 비유가 아니라 원래 예수님이 실제로 전달했을 법한 원래의 비유를 찾으려는 노력이 신약 학계에서 있어왔다. 2

예를 들어, 다드(C. H. Dodd, 1884-1973)는 예수님이 달란트(므나)의 비유(마 25:14-30; 눅 19:11-27)를 말씀하셨을 때에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초대교회가 이것을 도덕적 책임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비유로 바꾸어버렸다고 주장했다. 3 이와 마찬가지로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도 원래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위기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의미의 비유였는데, 나중에 교회에 의해서 재림에 관한 비유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4 그래서 비유 연구가들은 각각의 비유에는 각각 세가지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역사적 예수가 비유를 처음 이야기했을 때, 그리고 그 비유가 초대 교회의 상황에서 이해될 때, 마지막으로 그 비유가 복음서에 기록될 때 각각 그 강조점이 달랐을 것이라고 보았다.

예레미아스(J. Jeremias, 1900-1979)도 복음서에 제시되고 있는 비유에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벗겨내고, 또한 비유가 제시되는 문맥들을 제거해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추정할만한 가장 간단한 형태의 비유를 복원하려고 하였다. 예레미아스의 관점에서는 비유가 등장하는 문맥은 완전히 무시해야 할 것이다. 5 예수님이 실제로 하셨을 법한 말씀을 찾으려는 노력을 일컬어 정경 속에서 정경(canon in canon)을 찾는 시도라고 한다. 즉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진 정경인데, 그 안에서 실제로 역사적 예수가 했을 법한 것들이 진짜 정경(canon)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인 연구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연구가 가지는 전제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6

첫째로, 예수님이 비유를 한번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비유를 복원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랍비들은 반복적인 교육을 하였고, 운율에 따라 암송하도록 교육했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러한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7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산 위에서 산상수훈을 한번 말씀하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을 리 없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처럼, 같은 내용의 설교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을 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형의 비유가 단 하나만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전제이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비유를 제시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훌륭한 선생은 항상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반복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8

둘째로,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와 다르다는 전제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당연히 후대 크리스천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독교 공동체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흘러가면서 후대의 신앙적 고백들이 예수님에 대한 설명 속에 원칙적으로 추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모습이 후대의 크리스천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셋째로,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맥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는 전제에 불과하다. 플루서(David Flusser, 1917-2000)는 유대교에서 회자되었던 비유들을 분석하고 이것들을 복음서 속의 비유와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복음서에 기록된 비유는 원래의 배경을 그대로 잘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복음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비유의 도입 설명과 결론들도 역사적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예수로부터 전승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대교의 비유들과 비교해볼 때, 복음서에 기록된 비유가 후대의 초대교회에 의하여 각색되어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9 랍비들의 비유에서도 똑같이 도입부와 결론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비유인데, 그 비유가 역사적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을 법한 원래의 비유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서 텍스트를 하나의 독립적(autonomous)인 것으로 보고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텍스트는 독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입장이 오늘날 유행한다. 정해진 의미라는 것은 없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무한대로 그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포스트모던의 사조(思潮)이다.

예를 들어, 비아(Dan O. Via)는 비유는 저자의 의도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예수 당시의 원래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비유 그 자체를 문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10 이런 접근법은 결국 비유를 통제되지 않고 창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비아는 비유를 비극적 비유(tragic)와 희극적 비유(comic)로 나누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기존의 방법을 통해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있으나, 이것은 결국 해석자의 지평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나가는 것이며, 과거에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원래의 본문에 없었던 것을 마음대로 해석해냈던 것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펑크(Robert Funk, 1926-2005)나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의하면 비유의 해석은 무엇이 옳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적용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보았다. 독자들이 알레고리를 통해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로산은 비유는 역설들이며, 그 의미가 다중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입장은 톨버트(Mary Ann Tolbert)도 지지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비유는 여러 형태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미 복음서 자체가 같은 비유를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비유의 해석은 창작행위이며, 비유 자체의 다중의미 성격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1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비유 해석 책에서는 비유에 대한 바른 해석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어떤 의도로 비유를 말씀했는지 알 수도 없다고 한다. 12

하지만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기를 원하시는가에 있다. 물론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적용을 해 나갈 수 있지만, 이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the original meaning)를 발견해 나가는 일(exegesis)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제시된 그대로의 비유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13

물론 이러한 시도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며, 우리들의 해석은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삶의 정황과 연결된 주관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해석학적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제가 쓸데없는 노력일 수는 없다. 마치 우리의 인생에서의 모든 결정이 어쩔 수 없이 도박과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도박적 요소를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건전한 판단을 통한 선택을 통해 건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과 카지노에 달려가서 슬롯머신을 당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어차피 삶 전체가 어쩔 수 없이 도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카지노에 가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성경의 해석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마음껏 주관적인 해석을 해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적 노력을 통해서 바른 해석을 추구해나갈 필요가 있다. 14

베드로 사도는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길로 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벧후 3:16).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비유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소위 비유풀이라고 알려져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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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요아킴 예레미아스,『예수의 比喩』(분도출판사, 1974), 19-20.[]
  2. 김득중,『복음서의 비유들』(컨콜디아사, 1988)도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3.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Scribner, 1961), 146-153.[]
  4.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72-174.[]
  5. 요아킴 예레미아스,『예수의 比喩』(분도출판사, 1974), 53.[]
  6. 로버트 H. 스타인,『예수님의 비유: 해석원리와 적용』(새순출판사, 1988), 46.[]
  7. Birger Gerhardsson, Memory and Manuscript: Oral Tradition and Written Transmission in Rabbinic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Uppsala: Gleerup, 1961); Birger Gerhardsson, The Gospel Tradition (Lund: Gleerup, 1986); Harald Riesenfeld, The Gospel Tradition: Essays. (Oxford: Blackwell, 1970).[]
  8. Klyne R. Snodgrass, “From Allegorizing to Allegorizing: A History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s of Jesus,” in The Challenge of Jesus’ Parables ed.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Cambridge: Eerdmans, 2000), 27; T. W. Manson, The Sayings of Jesus (London: SCM, 1949), 260.[]
  9. Snodgrass, “From Allegorizing to Allegorizing,” 18.[]
  10. Dan Otto Via, Jr. The Parables (Philadelphia: Fortress, 1967).[]
  11. Mary Ann Tolbert, Perspectives on the Parables (Philadelphia: Fortress, 1979).[]
  12. Charles W. Hedrick, Many Things in Parables: Jesus and His Modern Critics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2.[]
  13.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23-24.[]
  14. 정성국,『묵상과 해석』(성서유니온, 2018), 27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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