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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으로 변한 찬양대 자리 변경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 찬양대가 서는 방법을 바꾸었다. 찬양대석에서 일어서서 찬양을 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찬양대가 회중석에 앉았다가 강대 쪽으로 나와서 찬양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바꾸기로 할 때에, 이런 변화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찬양대가 청중을 바라보고 찬양을 한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고, 찬양대원들도 설교하는 목사를 옆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바라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이건 복잡한 부차적인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찬양대가 강대단 앞으로 나오고 들어가는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었고, 찬양대석 위에 설치되어 있던 마이크 장치를 옮겨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찬양대원 중에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좀 더 긴 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들도 계셨다. 결국 강대단을 그 누구든지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개선하였다. 이건 정말 잘된 결정이었다. 찬양대원들이 앞에서 찬양을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개선했었어야 했던 것이었다. 미국에는 그런 편의시설들이 아주 잘 되어 있는데, 한국에 오니 그런 편의시설들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계기로 앞으로 교회의 모든 시설들을 누구든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선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찬양대원들이 강대단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스피커에서 잡음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끽… 지익” 하는 잡음이 찬양대원이 강대단으로 올라올 때, 그리고 다시 내려갈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나는 내 상식을 동원해서 광고했다. 마이크 선을 밟게 되면 이런 잡음이 날 수 있으니 찬양대원들은 오르내릴 때 선을 밟지 않도록 부탁을 드린 것이다. 하지만 매 주일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몇 주 전에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들의 귀를 막아야 했다. 청중 속에서 불만 소리도 들려왔다. “애 떨어지겠네.” 거룩하고 진지하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스피커에서 귀막을 울리도록 나는 소음 때문에 예배 분위기는 망쳐지고 말았다. 더욱 아름다운 찬양을 드림으로 멋진 예배를 만들고자 시도했던 찬양대 자리 변화인데, 결과는 우리들의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일까?

이런 상황이 되고나니 교인 중에 한 분이 앰프 시스템을 교체하는 것을 자원하였다. 나는 그런 성도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사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좋은 앰프 시스템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정말 좋지 않은 앰프 시스템 때문에 정말 고생해본 나로서는 앰프 시스템을 자원하여 교체하겠다는 분이 있을 때, 그렇게 하시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았다. 그분의 헌신은 고맙기는 했지만, 앰프 시스템 자체를 교체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타이어 펑크가 났는데 자동차를 아예 바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분을 설득했다. 감사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말이다. 언젠가 우리 교회도 더 좋은 앰프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약간의 문제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분이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의 찬양이 저절로 나왔다. 목회자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성도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힘들다. 성도들을 일일이 설득하다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오히려 내가 괜찮다고 사양할 입장이니 말이다. 그런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내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면서 마이크 선을 밟지 않는다고 찬양대원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사태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면서 문제의 원인이 마이크 선을 밟는데 있지 않고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주 전 모니터 스피커를 장만하면서 선공사를 했는데, 그때 했던 강대단에 설치된 잭이 느슨하게 공사하여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잭 부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강대단 위를 찬양대원들이 걸어가듯이 걸어가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강대단 아래에 있는 선 전체를 다시 깔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강대단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그 잡음이 나는 게 아닌가? 펄쩍펄쩍 뛰면서 강대단을 다녀보니, 어느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시공했던 업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업자가 그 부분의 선을 살펴보니 피복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갈아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사를 하고 난 다음 주일에 찬양대가 회중석에서 나와서 강대단으로 올라왔지만, 전혀 잡음이 나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전교인들 앞에서 사과했다. 확실하지 않은 어설픈 지식으로 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서, 결국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부주의하게 선을 밟는 범인이 있을 것이라 오해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웃을 향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형제를 향한 분노의 마음을 갖게 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교인들은 웃음으로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아마 형제를 향해 이해하기보다는 잠시나마 분노의 마음을 가졌던 것을 회개하기도 했을 것이다.

재앙처럼 보였던 찬양대 자리 재배치는 결국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지난 주 현악 소리에 맞추어 찬양을 하는 찬양대의 찬양이 아주 감동적이었다.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변화는 없다. 모든 변화는 더 나빠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는 것을 선호한다. 예전 방식만을 고집하면서 그게 제일 편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결국 그런 편한 방식이 쌓이고 쌓여서 신앙적 적폐(積弊)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과감하게 그러한 적폐들을 개선하려는 변화의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살아났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500년이 지나는 동안, 그리고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편한 방식이 쌓이고 쌓여서 신앙적 적폐(積弊)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편한 방식들을 개선해야 한다. 때로는 그러한 변화가 아플지라도 말이다.

201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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