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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만든다

요즘 나는 행복한 목회를 한다. 아마도 나의 마지막 사역지가 될 수도 있는 교회를 찾으면서, 나와 아내가 함께 드렸던 기도의 제목은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달라는 것이었다. 큰 규모의 교회로 인도하기보다는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유일한 기도의 제목이었고, 어쩌면 그러한 기도의 제목이 그대로 응답된 것 같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말이다.

우선 교우들이 부족한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버팀목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똑같은 죄인이지만, 교우들은 나를 믿어주고 있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일하는 교역자들이 정말 환상의 팀을 이루어 사역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이다. 우리 교역자들의 얼굴을 보면 행복해 보인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고 기쁘게 여기며, 우리 교회 교역자 실에서는 웃음이 떠나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이루어진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30여 년의 목회 여정 가운데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물론 교우들이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었기에 사역을 기쁘게 해올 수 있었다. 내가 사역했던 모든 교회의 성도님들은 정말 부족한 나를 사랑해주었다. 특히 필라델피아 사랑의 교회 성도들은 가족과 같이 지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이었다. 그러기에 정말 부족한 내가 그나마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다른 교역자들과의 관계였다. 늘 나와 호흡을 같이 해야 하고, 같은 비전을 가지고 움직여야 할 교역자들과의 관계는 종종 삐걱거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점에서 교역자들이 항상 골칫거리였다. 심지어 내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교역자도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언제나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그런 교역자들이 나타나 골치를 썩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목회를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소위 죽이 잘 맞는 교역자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고, 나를 믿어주는 교역자와 함께 일하는 기쁨이 너무 크고 행복하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이런 좋은 교역자들을 붙여준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는 너그럽게 교역자들에게 대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 담장을 쌓았었던 것 같다. 나는 단 한 번도 교역자들에게 권위적인 태도로 대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에 귀를 열고 사랑으로 대하는 데 있어서 부족했던 것 같다. 나는 교역자들에게 정말 잘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목회를 시작하고 30년이 지난 요즘 내가 달라졌다. 조급해지지 않고, 더욱 너그러워졌고, 교역자들과 이전보다는 친구처럼 지낸다.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더 많지만 말이다. 교역자들도 이제 마음을 내게 열어놓는 듯하다. 나랑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같이 놀고 즐긴다. 알고 보면 그 동안 교역자들이 종종 내게 악하게 대했던 것은 다 그 원인이 내게 있었던 셈이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열지 못했고, 내가 좀더 사랑으로 친구처럼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교역자들도 마음을 열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말씀이 맞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내가 화를 내면 결국 나만 손해를 본다. 내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결국 나만 외로워진다.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내겐 사랑이 쏟아져 온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조금씩 내가 나아지고 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 뒤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더 나아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켜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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