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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vs. 의지

사랑은 감정인가? 의지인가? 한편으로 사랑은 감정이다. 사랑의 느낌은 내가 의지를 가지기 전에 찾아오는 것이다. 한 눈에 반한다는 말처럼, 내가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려고 해서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가 의지를 가지기 전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자신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한 과정이 그렇다. 하지만 감정이 사랑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항상 감정적 요소가 강하여, 자신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제3자에 대한 사랑은 의지적 요소가 강하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은 감정으로 출발할 수 있지만 의지로 지탱하는 것이다. 제3자에 대한 사랑은 의지적인 요소에 의하여 시작하고 의지적인 요소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다. 물론 제3자에 대한 사랑도 감정적인 요소가 배제되지 않지만.

C.S. 루이스는 “좋아하는 것(to like)”은 감정이지만, “사랑하는 것(to love)”은 의지라고 조심스럽게 구분하면서, 좋아하는 것(to like)이나 싫어하는 것(to dislike)은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니라고 말한다. 1 마치 어떤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처럼, 어떤 타입의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으며, 어떤 타입의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좋아함과 좋아하지 않음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to love)과 미워하는 것(to hate)은 도덕적인 것이다. 우리는 미워하는 도덕적 악을 행해서는 안 되고, 사랑하는 도덕적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기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피하고, 가능하면 몸에 유익한 음식을 즐기도록 식생활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좋아하는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하여,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C.S. 루이스는 소화불량이 죄가 아닌 것처럼, 기질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없이 냉정하다고 하여 죄는 아니며, 그런 감정의 상태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싫다고 해서 상처를 주면, 점점 더 그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이라도 잘 대해주면, 점점 덜 싫어집니다. 2

남편에 대한 소망을 놓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사탄은 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니, 포기해 버리라고 우리의 귀에 속삭인다. 결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나는 이 남편과 결혼하기 위하여, 우리는 수십억명의 남자들을 포기하고 이 남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나와 결혼하기 위하여 수십억명의 여자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며 결혼의 서약을 했다. 결혼의 서약에서 죽을 때까지 좋아하겠다(to like)고 약속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겠다(to love)고 서약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본능적인 능력이 있다. 자신이 악을 행하는 습성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본능적인 능력이 있다. 자녀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 자녀들을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배우자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가? 결혼하기 전의 애인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과 결혼 한 후의 배우자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은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종종 내가 배우자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는 감정이 예전에 비하여 많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게 되었어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오히려 더 사랑의 혜택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사랑받는 가장 큰 비결은 내가 먼저 찾아가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종종 교회 내에서, 교회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대부분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랑은 부메랑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썬다 씽(Sundar Singh)의 일화가 있다. 썬다 씽은 어느 추운 겨울 폭풍과 폭설 을 맞으며 티벳 고원의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불교 승려 한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게 되었는데, 위험한 벼랑 옆을 지날 때 그 아래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그 벼랑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꼼작하지 못한 채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승려는 이 사람의 운명은 여기서 죽는 것이니 어찌 할 것인가 하면서 혼자 길을 서둘러 떠났다. 그런데 썬다 씽은 벼랑을 기어 내려가서 그 사람을 등에 업고, 길을 떠났다. 한참 길을 간 후에, 드디어 목적지인 수도원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것이었다. 발에 걸린 것은 앞서 갔던 승려였다. 그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얼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썬다 씽은 부상당한 사람을 업고 오느라, 추운 몸을 녹일 수가 있었고 자기 몸에서 나는 열기로 인하여 등에 업힌 사람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랑을 베풀지만, 결국 그 사랑의 최대 수혜자는 나 자신이 아닐까?

반면 미움은 더 미움을 낳는다. 독일인들은 처음에 유대인들이 미워서 학대하기 시작했겠지만, 학대를 했기 때문에 점점 더 크게 미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과 악은 모두 복리로 증가한다는 C.S. 루이스의 말은 옳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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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205.[]
  2.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206-207.[]
  3.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1),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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